목록虛其心 (211)
谷神不死
"깨달음 공부"는 물을 끓이는 것과 같습니다. 김이 좀 난다고 해서 불질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김이 나기 시작하면 온도 유지에 더욱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물이 끓기 시작했다고 불을 끄면 안 됩니다. 다시 식어서 원래대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솥 바닥이 보일 때까지, 솥에 물이 한 방울도 안 보일 때까지, 솥마저 녹아 사라질 때까지, 불을 늦추지 않겠다는 심정(心情)으로 불질을 해야 합니다.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 해맑은 하늘이 나타날 때까지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외로움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흰 구름과 같은 것이다. 우울함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감기와 같다. 감기 정도는 약을 먹지 않아도 일주일이면 물러난다. 들뜸, 우월감, 성취감도 나는 아니다. 그런 것 역시 무상(無常)하다. 들뜸은 저절로 스러지고, 언제까지나 우월감과 성취감 속에 머물 순 없다. 아쉬워도 보낼 수밖엔 없는 것들이다. 생각은 내가 아니다. 탐심도, 노여움도 나는 아니다. 생각에 좌지우지 흔들리지 말라. 더러는 외롭고 우울하고 불안해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라. 판단하지 말고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는 그것이 바로 나이다.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좋다. 그 텅 비어 있는 고요함 속에 머물러 보라. 거기엔 외로움도, 우울함도, 들뜸도, 우월감도 없다. 그곳은 하느님 품속이..
진정 깨닫고 싶다면 심심함을 용납해야 한다. 모든 수행법이란 에고(ego)를 심심하게 만드는 작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심함을 견뎌내는 노력을 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슨 짓이든지 한다. 배고프지 않은데도 먹고 마시고, 생각을 쉼 없이 과거와 미래로 옮기며 쓸데없는 근심, 걱정, 망상(妄想)에 빠지고... 술, 담배, 마약이나 섹스나 오락, 그도 아니면 일에 몰두하고... 자식이나 애완동물에 심하다 할 정도로 애착하고, 교회나 사찰 그리고 어디론가 분주히 쏘다니는 이유는 하나같이 모두 심심함 때문이다. 사실상 本來面目은 손대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것은 늘거나 줄지 않으며,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見性한 사람이 그리도 드문 이유는 단조로움을 용납치..
깨달음이 없는 한 우리는 분별력과 에고(ego; 自意識)의 주도(主導) 아래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재 의식(顯在意識), 즉 각성(覺醒)상태나 잠재의식(潛在意識; 꿈 상태) 등에서도 다름이 없다. 꿈의 상태에선 본연(本然)의식이 살아나 조작된 도덕성이나 분별력이 더러 힘을 잃어 각성상태에서는 불가능했던 일들이 쉽게도 일어난다. 거기선 왕왕 물리의 법칙도 도덕이나 양심, 분별도 힘을 잃는다. 순수의식(純粹意識)은 잠재의식과도 다른 특별한 의식이다. 그것은 무의식(無意識)도 아니어서 보통 제4 의식이라 한다. 그것을 위해선 깊은 삼매(samadhi)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지금의 이 각성상태나 꿈의 상태를 비켜 놓았을 때 드러난다. 현재 의식이나 잠재의식과는 별개로 말이다.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는가?" 물으면 어떤 스승은 말한다. "이미 깨달아 있다. 아무 것도 할 것은 없다. 그냥 내려 놓기만 하면 된다"라고... 나는 말한다. 릴렉스(relax)하라고... 영어권 사람 집에 초대받으면 그들은 친절하게, "네 집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라(feel at home)"고 한다. 그 말은 공부자가 자신에게 하면 좋은 말이다. 깨달음을 위해 제일 좋은 조건은 긴장을 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알아채는 자와 대상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 중 어느 쪽이 나인가?
진리(眞理)를 알아차리는 눈을 '도안(道眼)'이라고 하며, 그것은 나(ego)에게 속해 있지 않다. 몸과 마음을 내려놓으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큰 눈(靈眼)이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훔쳐보고 있다. '내가 보는 주체'라는 생각은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필경 착각일 테니 말이다. 공부가 부족한 사람은, 자기(ego)가 생각하고, 자기가 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본래면목) 역시 만나기 어렵다. 그리되면 답답하게 살 수밖에 없다. 하나이던 내가 둘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자기에서 벗어나 큰 눈에 한 번 맡겨보라. 다시 평안(平安)이 돌아올 테니...
지금 당신의 눈에 보이고 귀의 들리는 모든 것은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마음의 밭에 심어놓은 씨앗이 싹이 터 나타나는 것이다. 밝아진 사람은 인과(因果)에 어둡지 않으므로(不昧), 나타나는 결과를 불만 없이 받아들인다. 꽃나무를 심었으면 꽃을 볼 것이고, 사과나무를 심었으면 사과 맛을 볼 것이다. 깨달았다 할지라도 결코 因果의 法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살얼음 밟듯 생각을 조심한다. 우리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씨앗을 심기 위해 늘 자기 제어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과 자비(慈悲)라고 부른다.
마음이라는 나무에는 외로움, 우울함, 두려움, 피해 의식, 좌절, 절망감 등등 쓴맛 나는 열매가 열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가 아닌 허깨비입니다. 그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것만 올바로 이해하면 불안은 물론 스트레스, 트라우마로부터도 모두 해방됩니다. 혜가는 이 "괴로운 마음"을 낫게 해달라고 달마에게 부탁했습니다. 달마는 근본을 이야기합니다. "그 마음을 내게 가져오라. 그러면 낫게 해 주마"고 했습니다. 몇 날 며칠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마음을 찾지 못한 혜가가 달마에게 "찾지 못했다"라고 말하자, 달마는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낫게 해 주었다." 마음으로는 마음을 찾지 못합니다.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마음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없는데 우울함, 두려움, 좌절은 어디에서 찾을 수 ..
자기를 깨우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은 생각이 만드는 허깨비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무지(無知)함에서 비롯됩니다. 무지가 두려움을 부릅니다. 알고 있는 병은 病이 아닙니다. 알고 있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늘 깨우침의 자리와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붙지 않습니다. 그는 實在(에너지)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넉넉하고 온화합니다. 그의 마음속엔 긍정만 있습니다. 그에게는 부정이 와도 긍정으로 되살아납니다. 그는 언제나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삽니다.
무언가의 힘으로 세상이 멸망하여도 당신은 살아남을 것이라 믿는가? 사후(死後)에도 영혼(靈魂)은 죽지 않고 천당이나 지옥 등 어디론가 갈 것이라고 믿는가? 혹시 다른 어떤 생명체로 환생(還生)해 돌아올 것이라 믿는가? 혹은 부활(復活)하여 지상 낙원에서 살게 될 것이라 믿는가? 아니면 먼지처럼 사라져 '절대 무(無)'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가? 어떻게 믿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다. 그러나... 이리 믿었다, 저리 믿었다 하는 그놈이 누군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만이 유일하게 '실재(實在)'하며, 앞서 언급된 것들처럼 허구(虛構)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개벽(開闢)'이란 말은 활짝 열린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벽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동양에서 서양에서 수많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