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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실존(實存)은 본질(本質)에 우선한다." 기존의 철학을 입 다물게 한 사르트르의 말이다. 주기학(主氣學)이 주리학(主理學)에 대항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실학(實學)이 허학(虛學)을 덮듯이... 어찌하여 實存은 本質에 우선하는가? 실존은 본질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實存이란 무엇인가? 주체성을 가진 '지금 여기, 이 존재', 그것이 실존이다. 세상을 따라 살지 말고, 나를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실존주의다. 하지만 말만으로의 실존주의는 虛學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가 누군지, 자기 본질을 모르는 실존주의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심신을 하나로 품어 다스려 산란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氣에 전념(專念)하여 아기처럼 유연해지게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그것을 관조(觀照)할 수 있겠는가? 심신을 다스려 만사에 걸림 없게 할 수 있겠는가? 천문(天門) 여닫기를 자연에 맡겨 둘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배워 안 후에 그것들을 쓰레기처럼 버릴 수 있겠는가? 수고하고도 소유치 않고, 바라지 않고, 자랑치 않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그윽한 덕인(德人)이라 할만하다.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如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爲乎. 天門開闔, 能爲雌乎. 明白四達, 能無知乎. 生之, 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 * * * * 無爲 무위(無爲)는 그저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것을 말하..

故常無慾以觀其妙, 常有慾以觀其徼. 그러므로 사물의 실체를 알려면 마음을 넘어섬이 필요하고, 단순히 보고자 하는 욕심만으론 늘 우롱을 당할 뿐이다. 우리가 처음 생겨난 곳, 그 자리는 공적(空寂) 합니다. 그 곳에서 사방으로 氣가 뻗어 나가 경락(經絡)을 이루며, 그 경락을 통하여 생명 물질이 공급되고, 세포 분열을 거듭하여 마침내 우리의 육신을 이룹니다. 우리 육신의 근본 체계는 氣가 흐르는 경락 체계에 의해 구성되고 운영됩니다. 그 모든 경락의 근원에 소위 ‘丹田’이라 부르는 우리 육신의 근본처가 있습니다. 선도(仙道)는 양기(陽氣)를 양성하여 막혔던 경락을 열고, 축기(蓄氣)와 운기(運氣)를 통해 기경(奇經)을 열고, 결국 모든 경락의 근본처인 丹田에 들어 명(命) 공부를 마칩니다. 따라서 유욕(有欲..

도덕경은 정치 참고서만이 아닙니다. 그 안엔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잘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 * * * * 소유의 넘침은 차라리 부족함만 못하다. 날 선 칼을 더 날카롭게 하면 빨리 못쓰게 되고, 보물이 너무 많으면 지켜 낼 수 없으며, 재물과 벼슬로 교만해지면 스스로 화를 부르게 된다. 성공하여 명예를 얻으면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자연의 道다. 持而盈之, 不如其已. 揣而銳之, 不可長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成名遂身退, 天地道. * * * * * *인생의 낮과 밤 주(周)나라의 윤씨(尹氏)는 재산을 크게 다스리어 그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침저녁 없이 쉬지를 못하였다. 한 늙은 일꾼이 있었는데 근력(筋力)이 다했으되 그를 위해 더욱 부지런히 일하였..

단전(丹田)은 기운의 시작이며, 마지막입니다. 단전이 실(實)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으며, 언제나 이치를 따릅니다. 집착을 버리고, 늘 감사하며, 기뻐하면서 삽니다. 시간을 쪼개어 氣를 배(下丹田)에 모으십시오. 그것은 神仙이 되는 길입니다. 노자는 글로 말했습니다. 스스로 자존심을 세우지 않으면 다툴 일이 없고, 재물을 초개(草芥)처럼 여기면 헛마음이 사라지고, 세상의 영화를 포기하면 마음이 잔잔해진다. 그러므로 깨우친 자는 마음을 비워 氣를 배에 모으고, 집착을 버리고 내면을 튼튼하게 하며, 언제나 텅 빈 지식과 헛된 욕망을 없이 하므로, 그런 사람(이치를 아는 사람)에겐 이른바 시비 분별이 감히 나서지 못한다. 이렇게 하는 바 없이 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不..

도덕경(道德經)은 정치 참고서라고 할 수도 있다. 노자(老子는) 군주(君主)의 격(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상(太上)은 그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다음은 가까이하여 가상히 여기며, 다음은 그를 두려워하며, 그다음(最下)은 업신여긴다. 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之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 노자(老子)는 바람직한 군주의 상에 대해 “현명한 왕의 정치는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자기 것이 아닌 듯이 하고, 그 교화가 만물에 베풀어져도 백성들은 교화를 받았다는 느낌이 없다. 이처럼 현명한 왕의 공적과 교화는 뭐라고 칭할 수는 없지만 만물을 스스로 기쁘게 하니, 그는 측량할 수 없는 현묘한 경지에 서서 무위(無爲)의 세계에서 노니는 자이다.”라고 부언했다. 긴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수고하고도 소유치 않고, 바라지 않고, 자랑치 않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그윽한 德人이라 할 만하다. 生之, 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 * * 깨우친 자는 소유란 것은 잠시 맡아있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온다는 것을 알고, 결핍을 느끼고 사는 사람이나 자랑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번뇌니, 망상이니 하는 말을 하고 살지만, 사실은 우리가 떠나온 그 자리가 깨우침(菩提)이요, 자성(自性)이며, 진리(眞理)가 아니던가? 그것은 본래부터 청정(淸淨)하다. 우리에게는 닦아내고 제거해야 할 '마음의 때', 혹은 '티'라는 것이 본래부터 아예 없는 것이다. 때로는 미워하고, 때로는 짜증 내며, 때로는 분노하며 살아가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그대로 '완전'..
이름이란 사물을 가리키기 위해 임시로 빌려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나 시간,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동일한 사람을 ‘그 사람’, ‘아무개 씨’, ‘아들’, ‘그놈’, ‘김 부장’, ‘김 선생’, ‘그이’, ‘여보’, ‘아빠’, ‘자기’, ‘오빠’ 등등 그때그때 그 장소 그 장소에서 부르는 이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름만으로는 정확하게 그 사람을 지칭할 수가 없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은 무어라 이름하든 허락하겠지만, 그 이름이 당체(當體)를 가리키는 것은 아님을 말한 것입니다. 노자가 첫머리에서 도(道可道非常道)를 이야기한 직후 바로 명가명비상명을 말한 이유는 도(道)에 대하여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차 한번 잘못 이..
사람에겐 언론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있듯, 어떻게라도 개념화, 추정화 할 수 있지만(名可名), 그것이 늘 옳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非常命). 우주 폭발로 세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조물주가 세상을 만들었다고, 원숭이가 진화해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산의 높이가 몇 m인지, 바닷가 모래가 모두 몇 개인지,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몰라도 그만입니다. 그런 일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따로 있습니다. 神이 있는지 없는지,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자기를 알고 난 후 따져봐도 되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 거 몰라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요. 자기를 모르고 살면 ..
上善若水! 여기서 주어는 '물'이 아니고 '상선'입니다. 이 老子의 글은 上善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물은 상선의 서술어입니다. 善은 善일 뿐 上下가 없습니다. 상선은 善과 惡을 넘어선 본래의 자리(道)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에덴동산에 있었을 때, 선과 악을 몰랐습니다. 神과 같은 시각으로 고통과 죽음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홀연히 하느님과 같이 되고 싶은 貪心과 어리석음(癡心)이 생겨났습니다. 본래 하느님과 같았는데 말입니다(?). 성경은 뱀을 등장 시켜 原罪를 설명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느님과 같이 된다(창세기 3:5)'고 인간을 유혹합니다. 뱀 같은 미물이 어찌 사람에게 그런 정보를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뱀은 단지 뱀일 뿐입니다. 원흉을 뱀으로 만들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