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虛其心 (211)
谷神不死
역사 이래 외로움은 언제나 우리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막연하게 그것을 피하려고만 해왔습니다. 우리는 분명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만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나 아닌 가면을 쓰고 타자들의 배경 속에 자신을 감춘 채 그것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애를 씁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맹렬한 활동가도, 학문, 예술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도 외로움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감싸보려 해도 감싸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직시(直視)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뿐입니다..
問: 깨달음 후(悟後) 아공법공(我空法空)이 여실(如實)함에도 불구하고, 구(求)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答: 구(求)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아직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충족이 있으면 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돈오(頓悟)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자성(自性)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理가 氣에 의존하고 있듯, 性 역시 命의 호위(護衛)가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아직 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허전함은 여전히 남습니다. 소주천(小周天)을 통해 기운을 장악하시기를 권합니다. 氣가 충실해지면 아쉬움이 사라집니다. 당연히 구하는 마음도 가라앉습니다.
화(Anger)가 날 때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면 화를 내는 놈이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분명히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짜 나입니까? 화는 불같이 일어나다가도 상황이 바뀌면 곧 무산되어 버리는 뜬구름 같습니다. 화가 날 때 화를 내고 있는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분(憤)이 솟아 참지 못하는 놈이 있고,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는 지성(知性)을 가진 내가 있다는 것만 확실히 알면 화가 나도 그것은 화가 아닙니다. 싱겁기 짝이 없습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화는 마음(생각)이 만드는 것이므로, 호흡수를 세어 보든,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든 무엇을 하더라도 마음(생각)만 바꿔주면 간단히 물러나..
"道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애써서 이르는 곳도 아닙니다. "내려놓으라(放下着)"는 말을 그냥 따르십시오. 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벌써 깨달음은 가까이 와 있습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내가 지니고 있는 것들, 내가 사용하는 도구들은 모두 내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애쓸 필요도, 수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해탈(解脫)도, 선정(禪定)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내려놓기만 하면 됩니다.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것이 "그것"이니 말입니다. 오지도 가지도 않는 무위자연(無爲自然), 그것이 바로 깨달은 "나"입니다.
이 몸과 이 마음이 내가 아닌 이유는 그것이 변하는 것이라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내 몸"이요, "내 마음"이어서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고 내 소유물입니다. 그것은 내 집, 내 자동차가 내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진리(眞理)라 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는 "바로 나다"라고 답했습니다. 나는 변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있으니 찾아 헤맬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 마음속이나 마음 밖의 어떠한 우상(偶像)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나"입니다. 그것(性品)만 만나면 진리가 무엇인지는 저절로 알아질 테니 말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장미꽃을 바라볼 때, 그리고 베토벤 9번을 들을 때, 무엇이 그것을 보고 듣는가? 눈이 보는가? 귀가 듣는가? 눈과 귀는 보고 듣기 위한 보조 기관이 아닌가? 신경인가? 아니면 뇌인가? 그것들 역시 보조 기관이 아니던가? 그럼 누가 보고 듣고 느끼는가? 장미꽃을 볼 때, 베토벤을 들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눈에, 귀에, 신경에, 뇌에 있는가? 아니다. 당신은 이미 장미꽃에, 베토벤에 있다. 장미꽃을 떠나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면 당신은 곧 그리로 옮겨간다. 베토벤 9번에서 멀리 기적소리로 마음을 옮기면, 그리고 작년 가을 하늘 기러기 우는 소리를 생각해 내는 순간, 당신은 이미 그곳에 가 있다. 당신은 순간 이동의 명수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눈인가? 귀인가? 몸인가..
눈이 떠져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보는 그 눈으로 하느님은 나를 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떠지려면 내가 아닌 것들은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파란 하늘(본래면목)을 가리는 먹구름에 불과합니다. 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란 것을 아는 순간 눈은 떠집니다. 그리고 눈이 떠지는 순간, 삶의 고생스러움에서 벗어납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고 맙니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게 됩니다. Immanuel!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깊고, 밤새 기도를 해도 무소용입니다. 아무리 경전(經典)에 통달했다 해도, 몇 날 며칠을 선정(Samadhi)에 깊이 들어 있었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순간 바로 이전의 고통 상태로 돌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깨달음이란 의식적(意識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긍정적 생각 외에 은연(隱然)중 일어나는 스트레스를 주는 일체의 생각들에는 의미(意味)를 의식적으로 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혹 이런저런 미미한 생각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마치 뻐꾸기 소리나 시냇물 소리처럼 마음에 전혀 어려움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평화로움 속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들은 하나같이 생각들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는 데서 생깁니다. 그것은 집착(執着)으로 이어집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면 일체의 상(像)을 상(相)이 아니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깨달음,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무소유(無所有)의 삶이란 본성(本性) 속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물질적(物質的)인 것들을 소유(所有)하지 않고 궁핍하게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대저택에 살고 고급 차를 타고 다녀도, 집착(執着)이 없다면 진정한 無所有의 삶입니다. 無所有란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가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산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청빈(淸貧)하게 산다는 말이 아니고, 無所有라는 것마저 所有하지 않는다는 말, 즉 심령(心靈)이 가난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재산을 팔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온갖 것들이 자리 잡고 있다면 그것은 無所有가 아닙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無所有가 되려면 모든 것을 所有해야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성(自性)..
안식일을 지키는것을 신앙(信仰)으로 삼는 기독교 교단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하루는 일을 하지 않고 쉬며 지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안식(安息)이란 "편안하게 쉬는 것"이라고 국어사전은 말합니다. 안식일을 신앙하는 그들에게 궁금한 것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가?"입니다. 몸은 쉴지 몰라도, 마음 속에 근심 걱정이 요동친다면 과연 안식이 가능할까요? 게다가 일주일에 한번 정도의 안식으로 과연 안식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는 결코 안식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면 이것 저것에 휘둘리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깨우쳐야 합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머리로만이 아니러 가슴과 배로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되면 24시간 365일 안식할 수 있습니다. Im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