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4. 에고는 죽지 않는다 (Ego doesn't go away) (8)
谷神不死

불교 경전 금강경을 보면, 귀찮을 정도로 많이 나오는 말이 '아상(我相)'이며, 허망(虛妄)한 것이므로 제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역설한다. 그 영향인지 그 말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하루 빨리 버려야 할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한편으로는 그것을 마치 보물처럼 가슴에 지니고 산다는 것을 나는 안다. 아상(我相)이란, 단지 ‘나라고 하는 생각’이며, 나의 소유물일 뿐이다. 그것은 애지중지할 것도 못 되고, 내다 버릴 정도로 악취나는 것도 아니다. 아상(我相)은 그저 나하고 함께 사는 오랜 친구이며, 가족이다. 그것은 내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나타났으며, 죽일 수도, 갖다 버릴 수도 없는 물건이다. 아상(我相)에 대하여 신경질적인..

선정(禪定)에 들어 있을 때는 '참나(眞如)'에 주도권이 있지만, 눈을 뜨면 다시 에고(ego)에 주도권을 뺏겨 괴롭다는 고백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과거 석가모니도 동일하게 느꼈던 일이며, 그래서 석가모니는 선정(禪定)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라는 제의를 뒤로 하고 홀로 히말라야로 들어갔습니다. 괴롭다는 사람에게 스승은 그 해결책으로 내려놓음과 내맡김을 처방했다는데, 내려놓음과 내맡김은 수행자의 기본이 아니던가요? 석가모니가 내려놓음과 내맡김을 몰라서 설산(雪山)에서 육 년이나 보냈겠습니까? "참나"와 "에고"는 하나입니다. 영어사전에서 에고를 찾으면 자아(自我)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고(ego)는 죽지 않습니다. 숨과 에너지가 있는 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생각을 내려놓는 것, 분별하지 않음(唯嫌揀擇), 이 두 가지가 깨우침의 직코스이다. 에고(ego)가 생각이고, 좋다/나쁘다를 분별하기 때문이다. Epoche(에포케, 판단 중지)란 에고를 물러서게 하는 것이며, 그 자리엔 자각(自覺)만 남게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에고에 매달리지 말라. 에고가 없어도 나(自覺)는 존재하지만 내가 없으면 에고도 없다. 에고가 없이는 살기 어렵지만, 그것은 단지 진여(眞如)의 그림자일 뿐이다.
'에고(ego)를 버려야 한다', '에고를 죽여야 한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Ego를 버리고 죽이기에 앞서 Ego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에고는 나 자신(自我)을 가리키는 철학적 표현으로,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 행위의 주체이며, 체험의 내용이 변해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에고이스트'라 하면 통상 이기주의자를 가리키지만, 세상에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 아닌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고 외치고 싶다. 에고는 버릴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다. 그것이 없다면 세상도 없기 때문이다. 에고가 문제가 아니라, 무지(無知)가 문제다. 공부라는 것은 에고를 갈고 닦아 본래의 성품(性品)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에고 따로, 性品 따로가 아니라, 그 둘은 하나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팔이 둘이지만 한 ..
깨달은 사람(見性)도 필요할 때는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그들은 잠잘 때 꿈도 꾸지 않고, 평시엔 늘 넋 놓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생각을 안 하고 살 도리가 없고, 의식의 쓰레기를 정리하려면 꿈 역시 필요합니다. 무아(無我)가 진정 나무토막이나 바위가 되는 거라면, 숨도 쉬지 말고, 밥도 먹지 말아야겠지만 말입니다.
에고는 생각과 분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만듭니다. 생각이 없이는 에고가 작용할 수 없습니다.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드러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自性은 공적(空寂)한 판(Screen)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자리는 생각의 놀이터가 됩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으로 나뉘며, 그 위에 천변만화(千變萬化)가 일어납니다. 과거나 현재, 미래는 그 자리에 공존하며, 여기와 거기도 사실상은 생각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판(板) 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 위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켜보는 신비한 것(cognition)이 바로 당신 자신이며, 그것이 곧 영지(靈知)라고 불리는 자성(自性)입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분별심(分別心)이 없어진다고요?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분별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조차 없습니다. 덕장(德將)은 싸우지 않고 이깁니다. 살생을 피하고 항복 받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습니다. 에고는 죽일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에고로부터 주권(主權)을 되찾아 오는 것입니다. 이 몸과 이 마음이 살아있는 한 에고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우르면서 자기 일을 하게 하면 됩니다. 주도권(主導權)만 되찾아 오면 만사는 순조롭게 흘러갑니다.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는 한, 에고는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과 마음이 있는 한, 탐냄, 성냄, 어리석음 역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에고를 버리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역사상 살아있는 어느 누구도 에고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에고는 애쓴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애쓰는 그것이 바로 에고이니 말입니다. 본성(本性)을 깨우쳤다면 그냥 두어도 에고는 저절로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저 조용히 있도록 그대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자연무위(自然無爲)라고 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에고와 다투지 않습니다. 그는 에고를 이해하고 설득하고 알아서 순복(順伏)하게 만듭니다. 에고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고, 스스로 맡은 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