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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나', 즉 자아(自我)라는 것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싯다르타는 '무기(無記)'를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아는 없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무기했다고 불경(佛經)은 전한다. (참고로, '무기'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뜻이다) 좀 답답하겠지만, 자아란 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중도적(中道的)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문(禪門)에서는 "있다"고 해도 30방(榜), "없다"고 해도 30방(榜)을 준다고 했다. 나는 에고(自我)의 실재(實在)를 말한다.그리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가 '에고'이다. 과거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았을 수 있고, 미래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에고는 엄연(儼然)하다. 하지만 "에고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글을 읽고 발끈하는 사..
나, 즉 "자아(自我)라는 것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싯다르타는 무기(無記)를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자아(에고; ego)는 없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무기 했다고 불경(佛經)은 전한다. 참고로, '무기'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뜻이다. 좀 답답하겠지만, 자아(에고)란 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중도적(中道的)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문(禪門)에서는 있다고 해도 30방(榜), 없다고 해도 30방(榜)을 주었었다. 나는 에고(自我)의 실재(實在)를 주장한다. 그리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가 '에고'이다. 과거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았을 수 있고, 미래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에고는 엄연(儼然)하다. 에고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자..
자기를 둘로 나누지 말라. 나라는 것은 몸과 마음, 그리고 에너지(氣)의 종합체이다. 그중 하나만 부실해도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다. '참나'라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마치 토끼 뿔, 거북이 털을 찾는 것과 같다. '참나'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에고(ego)를 버려야 한다, 심지어 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다.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에고는 나 자신, 즉 자아(自我)이기 때문이다. '참나'라는 조작된 것에 속지 말고, 에고를 죽이려 하지 말라.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 바로 에고이기 때문이다. '참나'와 '에고'는 둘이 아니다. 에고는 버리거나 죽일 대상이 아니라, 또 하나의 에고(Superego)에 의해 훈련되고 다듬기만 하면 되는..
사람은 누구나 남들로부터 배려를 받으며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기를 우선 배려하는 사람을 가리켜 '에고이스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남들로부터 배려를 받을 때, 과연 나는 그럴만한 사람인가, 그리고 나는 남을 우선 배려하며 살고 있는지를 자기(ego)에게 자주 물어야 한다. 자기는 미뤄두고, 진정 상대 우선으로 사는 대의(大義)를 우선시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인(君子)'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어쭙잖게 대인(大人)인 척하는 그것이 자기가 소인배라는 것을 탄로 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대인 소리를 들으려면, 우선 에고(ego)가 무엇인지부터 알고 있어야 한다. 에고가 무언지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대인이 될 수 없다. 나는 에고이스트(egoist)로 살아보라 권한다. 그 말은 남을 ..
자아 발견은 자기 자신의 상태와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이상이 무엇인지를 알면서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떤 환경과 조건에 처해 있으며, 앞으로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 나갈지를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자아실현이란 자기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 자아실현은 시대마다 다양한 의미를 가져왔고, 각기 사상마다 다양하게 자아실현의 과정들을 제시해 왔다. 현대 사회에서 자아실현의 의미는 인간이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늘 변화하며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존재라고 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창조적이며,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 존재로 인식한다. -위의 글은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2007.12.15. 한림학사)을 정리한 것이다-..
에고(自我; ego)를 부정하는 사람처럼 egotistic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에고와 자기를 구별하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에고를 부정하지 말라. 에고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自己)를 부정하는 것이다. 에고를 죽인다고 협박하지 말라. 에고는 당신이 죽기 전까진 죽지 않는다. 혹시 당신이 죽어도 에고는 살아남을지 모른다. 에고란 우리말로 하면 자아(自我)이다. 어디서 얻어온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없다’는 자가당착에 빠지지 말라. 내가 곧 에고이기 때문이다. 에고를 잘 살피며 사는 사람, 그야말로 깨달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생각을 내려놓는 것, 분별하지 않음(唯嫌揀擇), 이 두 가지가 깨우침의 직코스이다. 스승들은 에고를 내려놓으라 한다. 에고는 생각이고, 좋다-나쁘다를 분별하는 중심이기 때문이다. Epoche(판단정지)란 에고를 물러서게 하는 것이며, 그 자리엔 자각(自覺)만 남게 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는가? 에고에 매달리지 말라. 에고가 없어도 나(自覺)는 존재하지만, 내가 없으면 에고도 없다. 에고가 없이 살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단지 진여(眞如)의 그림자일 뿐이다.
에고는 심심한 것을 못 참습니다. 생각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라도 채워야 합니다.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심심한 것을 못 참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생각이 쉬어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에고는 무엇이라도 해야(일중독) 편안합니다. 담배, 술, Game(도박), Sex 하다못해 망상(妄想)이라도 지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하다 하다 못하면 전쟁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자살까지도 합니다. 에고의 뿌리를 찾은 것을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그 후엔 심심함을 즐기며 사는 것이 너무나 행복해집니다.
혼자 있는 것이 유리한 이유 구애받음이 없이 나를 풀어둘 수 있다. 남에게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나 자신과만 대화할 수 있다. 적나라한 에고(ego)를 만날 수가 있다. 깨달음(自性)을 만나기가 유리하다. 단, 먼저 에고부터 허심탄회하게 만나야 한다. 더 이상 에고와 할 일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자성(自性)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에고(ego)를 자아(自我)와 동일시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自我 = 에고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에고는 自我의 모두가 아니다. 그것은 가늠키 어려운 自我의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아(無我)라는 말은 에고를 감시 감독하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상 이타적(利他的)인 것과 이기심(利己的)은 나눌 수 없다. 이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이기적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에고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에고는 결코 우리의 생존과 별도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利己的인 부분이 상당하다는 것에 깨어있기만 하면 된다. 생명체(生命體)의 기본은 (利己的)이기에 에고를 없앤다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깨달았다고 해서 에고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