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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세상에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나요?그것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이유입니다.깨닫기 위해서는 관심사 모두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합니다.깨달음(見性)이란 자기가 누군지를 알아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위해선 신앙(信仰)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상(神) 앞에 엎드릴 필요가 없으며, 교리(敎理)나 계율(戒律), 그리고 돈이나 권력, 명예는 필수적이지 않습니다.깨달음은 중도(中道)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깨닫는 순간, 삶의 어려움(苦)들이 모두 해결됩니다.깨닫고 나면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삶을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입니다.깨닫기는 어렵지 않습니다.약간의 집중력과 에너지, 그리고 가치에 대한 바른 견해(正見)만 있으면 되기 때문..

종교와 신앙을 혼동하는 한 깨달을 수 없다.그런 사람은 죽을 때까지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다.자기가 종교(宗敎)가 되고, 자기 자신을 신앙(信仰)하지 못하면, 늘 무엇인가에 엎드리며 불안하게 살 수밖에 없다.싯다르타가 무아(無我)를 이야기한 것은 정말 '내가 없어서'가 아니다.無我만이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속지 말라.내가 없는 사람에게는 깨달음도, 소주천(小周天)도 없다.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는 단전(丹田)을 열지도, 소주천을 할 수도 없다. 단전과 소주천을 최우선으로 생각지 못하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스승과 경쟁하려 하지 말라.그처럼 소중한 존재는 없다.그는 나를 신(神)의 위치에 올려주고, 물러나 자기 갈 곳으로 가는 존재다.스승은 제자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마치 ..

단전(丹田)은 누구에게나 있다.하복부 중앙에 우리가 알아채 주길 바라며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그것을 깨어나게 하고 활성화하는 것이 '단전연단(丹田鍊鍛)'이다.그것이 활성화되었느냐, 아니냐는 너무 중요하다.그 이유는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기 때문이다.자기의 영적(靈的)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짐승의 범주에 있다. 짐승 역시 먹고, 마시고, 소유하려 하고, 생식(sex)하기 때문이다.단전은 우리의 몸과 정신을 연결하며 우리가 가진 영성(靈性)과 연결해 준다.단전 연단(鍊鍛)을 위해선 순서가 있다.먼저 단전을 알아야 하고,연단하는 법을 배워 익혀야 한다.말도 필요 없고, 교리(敎理)도 중요치 않다.먼저 단전을 알아채고, 신실하고 꾸준히 법에 따라 수련해야 한다.그것은 신앙에 앞서 있다.인간이 우선하..

행복의 지름길은 자기 다스림에 있건만, 사람들은 스스로 포기하고 무언가 힘 있다고 생각되는 것에 의지하려고만 한다.그 1번이 신앙이요,그다음이 돈이요, 권력이다.하지만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에 무지하면, 신앙은 자기를 잃게 만들고, 일생을 그것에 속아 노예처럼 살게 한다.돈과 권력이 자유를 주는 것 같아도, 그것 역시 마약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살아본 사람은 안다.그 원인은 모두가 자기에 대해 몰라서다.분명 내 것이지만 알지 못하는 그것, 기운(氣運)이 나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그것으로 살고 있으면서 말이다.다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氣)라는 것이 Fact이다.조금만 에너지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이 건강한 몸과 마음을 만들 뿐만 아니라, 삶을 윤택하게 하..

자기가 누군지를 알려면 먼저 자기(에고)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거기에는 신앙(信仰)도, 교리(敎理)도 필요 없습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자기를 덤덤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아! 이것이 나의 본모습이구나" 할 때, 거기에 만족함이나 불만, 뿌듯하거나 우울함이 조금이라도 실려있다면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서십시오. 그것은 본래 모습이 아닌 에고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혹시 시기하는 마음이나 노여운 감정이 살아있다면 한 발 더 물러나야 합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적적(寂寂)함만이 지속된다면 일단계는 통과입니다.무사인(無事人)이 된 겁니다. 그다음에 할 일은 그저 지켜보고, 지켜보고, 지켜보기 뿐입니다.

신앙(信仰)은 이성적이지 않다.논리적이지도 않다.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이성과 논리를 잠시 차용한다. 이성과 논리가 개입하면 신앙은 힘을 잃는다.신학(神學)이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 신(神)은 학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지면 따질수록, 神(?)은 인간들에게서 멀어진다.그것은 인간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단체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들은 이성적(理性的)으로만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理性)은 늘 부족함을 느끼며, 무언가가 그것을 채워주기를 바란다. 비논리적이지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진복자(眞福者)", 그리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신앙을 종교라고 믿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인간이 동물처럼 된다. 종교(宗敎)와 신앙을 구별하는..

세상엔 세 부류의 사람이 산다. 상사는 도(道)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중사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하사는 도를 들으면 비웃는다. 반신반의하거나 비웃음이 없는 도는 도가 아니다. 노자(老子)의 말이다. 1. 돈과 권력, 명예를 좇으며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세상 사람의 99%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람, 이른바 하사(下士)다. 2. 무상( 無常)함을 깨우쳐 삶의 일체가 고통임을 알아채 세상과 유리된 삶을 사는 수행자를 자처하는 사람. 무아(無我)까지 깨우쳐 윤회를 넘어 이번 생을 마치면 다시는 세상에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염세적(厭世的)인 1%의 사람이 있다. 혹시 그런 사람이라면 중사(中士)다. 3. 희귀하기는 해도, 도(道)를 좇지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도와 합일한 사람, 1%에도 속할 수 없는..

세상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과, 의심으로 구원받는 사람,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필자는 이중인격자이다. 그는 믿음과 의심을 반반씩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온전한 신앙인이 되지 못했고, 시한부 종말론을 거부했다. 신앙인에게 의심은 금물이다. 신앙인에게 교리를 따지지 말라. 그들에겐 절대적 믿음, "믿습니다, 아멘"만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동기부여는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요한의 침례 의식 중, 요단강 위에 나타난 비둘기 모양의 성령을 통해 자신이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인했다. 열려있다고 알려진 김기석 목사를 만나, "어떻게 하면 믿음을 키울 수 있습니..

살아있는 사람의 관심사는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이다. 별 관심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많지만 말이다. 그 둘이 모든 불안(不安)의 시작이다. 불안의 중심은 죽음이며, 그것이 고통을 부르는 제1원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이다. 신앙처럼 편한 것은 없다. 그것이 신앙이 세상에 만연하는 이유다. 어렵게 따지지 말고, 그냥 믿어버리면 만사 오케이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盲信)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깨우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수행(修行)이라 한다. 세상에 종교라 불리는 많은 신앙이 있는데, 용도는 단지 불안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그것에 안주하면 임시적이지만 평안을 얻는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

신앙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깨우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또한 그런 사람에게는 수행도 크게 필요 없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이미 결정 난 사항이므로, 재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겐 오직 숭배 행위만 필요하다. 신앙에 대해 학문적 고찰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럴 때 신학이라는 것은 단지 신앙의 대변일 뿐이다. 하지만 수행자에게는 큰 신앙이 필요치 않다. 수행이란 자기를 닦아내 그 밑에 자리 잡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므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신이나 부처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수행을 이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만 있으면 된다. 철학과 인문학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사유와 논리를 중요시하며 사는데, 만나보면 쓸데없는 이론에 너무 시간을 쓴다는 느낌을 받게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