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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선도(仙道) 공부는 퇴화한 단전(丹田)을 부활시키고, 소주천(小周天), 즉 임독맥(任督脈)을 관통시켜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일견 어려워 보이지만, 일심(一心)을 가지고 조금만 시간을 써보세요. 임독맥은 엄연히 존재하고, 단전 역시 살아있으므로 의지를 세우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밥 먹듯이 공부하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참고로 나는 하루 한 번 밥을 먹습니다. 불도(佛道) 공부는 더 쉽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만 알아내면 끝나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나'를 모르고 어찌 살아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공부는 단어의 의미를 아는 것으로 90%가 완성됩니다. 나머지 10%는 끈기입니다. 어제 경주의 백운암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왔습니다. 백운 스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
시체도 생명(生命)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썩어서 사라져 버리는 데도 말입니다. 관념(觀念)은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집니다. 죽음 후에도 영혼(Atman)은 살아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죽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존재는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는 한 유지되는데 말입니다. Battery가 방전되는 순간 자동차가 아니듯이, 에너지가 끊기는 순간 우리는 살아있지 못합니다. 죽음이 경험되지 못하는 것은 의식(意識)마저 끊기기 때문입니다.해석은 자유입니다만, 그 상태를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공(空)이란 에너지(氣)이란 에너지가 텅 비어(空) 있음을 말합니다. 견성(見性)이란 의식과 그 의식의 바탕(氣)을 알아챈 것입니다. 그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합니..
우리는 무엇으로도 견성(見性)할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믿습니다", "In sha Allah",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으로 깨칠 수 있다.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똥 막대기", "뜰 앞에 잣나무"로 깨칠 수 있다. 하늘, 땅, 나무, 새, 시냇물, 아기 웃는 모습을 보고 깨칠 수 있다. 종소리, 풍경소리, 악쓰는 소리, 시계 소리를 듣고도 바로 깨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따라가서는 깨칠 수 없다. 따라가지만 않으면, 正坐 안 해도, 요가 안 해도, 기도 염불 안 해도, 단전호흡(丹田呼吸) 안 해도, 참선(參禪) 안 해도 바로 見性할 수 있다. 그것들을 알아채는 놈, 만들어 내는 놈, 그것을 외우고 있는 놈, 그것을 보고 듣는 놈과 계합(契合..
지혜자는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말라! 그것이 세상을 이렇게 어지럽고 폭력적으로 만든 것이다. 내가 누군지, 神이 있는지 없는지, 죽은 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윤회를 하는지 마는지, 우리는 모른다. 오직 알아갈 뿐이다. 모르는 건 그저 모른다고 하라. 모른다고 하여 나의 자존(自尊)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놈은 최소한 알고 있어야 한다. 모르는 것은 밀어두고, 알고 있는 그것(Fact)에 정성을 들여라. 신기하게도 어려움이 사라지고 편안해질 것이다. 그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견성(見性)은 단지 성품(性品)을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적용해 살지 못한다면, '빛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오후(悟後) 공부가 필요합니다. 불퇴진(不退轉)을 이룬 출가자(出家者)들이야 별문제가 없겠으나, 세간(世間)의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돈에 속고, 사랑에 속고, 자존심이란 놈에 깜박 속아 넘어가기 십상입니다. 깨달음에도 면역력이 필요합니다. 혹자는 화두(話頭)를 놓지 않는 것으로 방편(方便)을 삼고, 누구는 깨우침을 Remind 하는 것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고 하지만, 에너지가 부족하게 되면 닥쳐오는 역경계(逆境界)를 담담히 넘기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모토로 하는 사람들의 집단인 종교계에도 불협화음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결핍감의 부족분을 ..
우리의 삶은 몰입(沒入)으로 이어져 있다. 먹는 것, 놀이, 심지어 잠자는 것 역시 몰입이다. 이성(異性)에게 몰입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화초, 개, 고양이에게 몰입한다. 몰입 중 가장 바람직한 몰입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세상에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으며, 그것의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몰입은 결과가 있다는 것에서 멍때림과는 다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그것인지도 모른다. 자기에 몰입해 자기를 알아챈 것을 가리켜 '깨달음'이라 한다. 성품(性品)을 본다는 것, 즉 견성(見性)이다.
가르침은 간단명료해야 한다. 본인의 지식 자랑은 가르침이 아니다. 견성(見性)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바르게 깨우친 사람은 쉽게 이치를 설명하고, 난해한 것은 비유로 대신한다. 계율(戒律)과 고행은 필요 없다. 자기를 밝히는 것뿐인데, 무슨 단계가 그리도 많으며, 무엇이 그리도 복잡하단 말인가? 중도 포기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애를 써도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전(經典)이나 어록(語錄)은 깨우침을 얻은 후에 읽어도 된다. 얕은 인식으로 견문만을 넓히다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바른 깨달음에서 멀어진다. 선도(仙道)는 승강개합의수단전(昇降開合意守丹田)이면 끝이다. 그냥 숨을 걸어 힘을 빼고, 올리고 내리고(昇降), 열고 닫고(開合) 움직이면서 丹田에 마음을 두고만 있으면, 저절로 축기(..
어설프게 마음공부를 한 사람의 병폐는 무엇이나 두루뭉술하게 생각하려 하고, 그렇게 말하려는 경향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른 식견(正見)이 아니며, 깨어있음 역시 아닙니다. 그것을 무기공(無記空)에 빠졌다고 합니다. 見性을 했다고 '술에 술 타고, 물에 물 타는 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둥근 것은 둥글고, 세모난 것은 세모나며, 부처는 부처고, 중생은 중생입니다. 분별심이 없어졌다는 것은 쓸데없는 머리를 굴리지 말라는 것이지, 대강 얼버무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더러는 면도날보다 더 날카롭고, 청양고추보다 더 매울 수 있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역시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지만, 그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사는 것, 그것이 깨달음의 속성입니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던 것들이 알고 보니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지만... 그것을 보고, 듣고, 알아채는 당체(當體)는 언제나 변함없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로병사는 실제가 아니지만, 그것의 주체만이 실재(實在)한다는 자각(自覺)도 필요하고... 그것을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선가(仙家)에서는 그것이 무위로 이루어지는 것(단전호흡이 되면)이어서 별로 중요시하지 않지만 , 불가(佛家)에선 사람이 해야 할 최선이라며 중히 여기는 일입니다. 참고하십시오.
도(道)는 보이고 들리지 않지만, 존재의 근본입니다. 에너지 역시 시작이 언제인지 오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존재를 있게 하고 유지하는 작용(作用)의 주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불도(佛道)는 깨달음, 즉 마음자리를 알아채는 것을 공부의 주체로 생각하지만, 선도(仙道)는 깨달음과 에너지(氣) 공부를 동시에 하는(性命双修) 융통성이 있습니다. 佛道에는 깨달음 얻음이 모든 것이므로 에너지는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仙道는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에너지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발기수(理發氣隨)든, 기발이승(氣發理乘)이든, 理와 氣가 하나(理氣一元論)라는 것은 분명하며, 그런 맥락에서 선불합종(仙佛合宗)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仙道를 통해 연기화신(鍊氣化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