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5. 진리 (the Truth) (17)
谷神不死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성(自性)의 확인, 즉 깨달음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거의 무시하며 삽니다. 그것이 우리가 무엇인가에 지배당하고 괴롭게 사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만 있다면 행복하게 살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돈과 권력을 지닌 사람 가운데 행복하다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더 많은 재물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지면 해결되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더 큰 결핍과 더 깊은 불행을 일으킬 뿐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자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되면 크게 후회할 것입니다. 인공지능 로봇(AI)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싯다르타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가르쳤다고 합니다만, 저는 의식(意識)의 초점(焦點)이 잡히면 상락아정(常樂我淨: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상(常), 괴로움이 없고 평온한 낙(樂), 대아(大我)·진아(眞我)의 경지로서 집착을 떠나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아(我),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정(淨))을 느끼고, 점점 현실 생활에서도 그것을 실감(實感)합니다. 그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그리되면 과거엔 이해(理解)가 되지 않았던 성현(聖賢)들의 말씀이 저절로 풀리고, 그 합리성(合理性)을 실감합니다. 그것은 의식의 초점을 잡는 노하우(knowhow)의 첫 체험을 한 날 저에게 각인(刻印)된 듯싶습니다. 가끔 일상생활 속에서 무상(無常)과 고(苦)가 미미(微微)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럴 땐 저절로..
교리(敎理) 제일주의, 율법(律法) 제일주의, 경전(經典)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평생을 율법과 경전에 바치며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한번 깨달음 체험을 하는 것과는 비길 수가 없다. 깨달음이란 진리(眞理)와 계합(契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리나 율법이나 경전은 진리(眞理)가 아니다. 진리란 영원해야 한다. 어제는 이랬는데 오늘은 아니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동쪽에선 이것을 지키는데 서쪽에선 저것을 지킨다면 그것 역시 진리는 아니며, 어제는 이것을 믿었다가 오늘은 저것을 믿는다면 그것을 종교(宗敎)라고 불러선 안 된다. 남의 말을 듣거나 책에서 읽은 것을 진리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철두철미한 체험을 통하여 깨우친 후 어느 쪽으로 가늠한다고 할지라도 전혀 틀림이 없는 과거, 현..
싯다르타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여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변치 않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에너지(氣)와 자성(自性)입니다. 그것에서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출현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나옵니다. 에너지(氣)와 自性을 동시에 수련하는 것을 가리켜 성명쌍수(性命雙修)라 합니다. 그 수련법은 오랜 세월 백두산 신선(神仙)들에 의해 전해졌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선도(仙道)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자기 성품(性品)을 만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외부의 어떤 초월적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자성(自性)입니다. 초월적 힘을 받더라도 받을 "내"가 있어야 합니다. 받을 "나"가 분명치 않으면, 초월적 힘이 오더라도 어느 자리로 내려오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이고, 소중한 것은 '진여자성(眞如自性)'입니다. 무엇에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하늘 위아래에 홀로 존중받는 존재(天上天下 唯我獨尊)입니다. 나를 깨우치는 순간, 선계(仙界)로 이동하여 불멸(不滅)을 얻게 됩니다.
분별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와 둘, 너와 나, 산과 바다를 구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은 무엇에라도 선악(善惡)의 딱지를 붙이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 선악과(善惡果)를 먹은 것이 원죄(原罪)가 되는 것이다. 세상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다. 선악은 당신의 에고가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이 되면 그대로 견성(見性)인 것이다.
진리(眞理)가 우리의 관심사이건 아니건, 우리는 시종일관 진리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 이래 진리는 사람들에 의해 탐구되어 왔으며, 진리를 구하려 일부러 역경에 들어가며, 진리를 지킨다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까지도 버려왔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행위가 정작 진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허탈할까? 진리는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우리는 진리로 먹고, 진리로 자며, 진리로 인해 세상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진리는 배우는 것이 아니고, 탐구할 수 있는 것도, 신앙해야 할 것도, 애써서 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지금 여기에 생생히 살아있는 이것'이다.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이것, 그리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채는 이것..
깨달음이란 자성(自性)을 깨우치는 것, 이른바 견성(見性)입니다. 그것은 Oneness, 즉 Brahman과 Atman의 합일(合一), 그리고 알라의 품에 안기는 것이며, 이기(理氣)의 일원(一元)이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이고, 늘 하느님과 함께(Immanuel)입니다. 견문각지(見聞覺知) 모두가 깨달음의 방편입니다. 깨달음은 서울에 입성(入城)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동문으로 들어가든, 서문, 남문 어느 문을 통해서든, 우리는 서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깨닫고 나면 모든 경전(經典)과 통합니다. 어떤 성인(聖人)의 말씀이든지 그 의미가 저절로 가슴에 전해집니다. 신앙(信仰)은 진리(眞理)가 아닐 수 있습니다. 고로 신앙을 통해서는 깨닫기 어렵습니다. 신앙인들은 오직 자기가 신봉하는 것만을 진리..
선악은 둘이 아닙니다. 善이 없어서는 惡이 있을 수 없고, 惡이 있음으로 善도 있기 때문입니다. 밝음과 어두움, 아름다움과 추함, 있음과 없음, 편리함과 불편함, 넉넉함과 부족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는 서로를 받쳐주는 기둥이기 때문입니다. 見性이란 '하나'임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상반되는 것들이 사실은 모두 '하나'로부터 연유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싸움에선 선이 이겨야 하고, 추함보다는 아름다움이, 불편보다는 편리함이, 부족함보다는 넉넉함을 더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 천지신명(天地神明), 본래면목(本來面目), 공(空)으로부터 출현했음에 늘 어둡지 않으면서도 마음은 더 좋은 쪽 편에 서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모순적인 것 같아도,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