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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자기를 고정화하지 말라.다가와 주는 모든 것들을 수용하라. 자기를 고정화하는 순간, 진화(進化)는 정지한다. 존재(Existence)란 계속해서 변해야만 한다.불교인이라면 기독교 시각을 가지고,기독교인이라면 불교의 입장에서 바라보라. 언제든 내가 믿고 있는 것을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더 이상 의심을 할 수 없을 때까지...

'나'는 내가 조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단지 그 존재를 알아채기만 하면 됩니다. 조정이 가능한 대상은 몸과 마음입니다.몸과 마음은 내가 사용하는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끄달리며 사는 이유는 몸과 마음이 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내가 누군지를 알아채는 순간, 몸과 마음은 나의 휘하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정신력(念力)을 사용하여 몸과 마음을 다스립니다.물론 정신도 나는 아닙니다.정신도 내가 사용하는 도구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하늘 아래, 땅 위에 존중받을 것은 오직 나뿐입니다.그것을 알고 나면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그 말을 한 그 사람을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면, 생각을 안 하고 멍하니 있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요즘 유행하는 멍때리는 것은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 아닌가?참선이나 명상 같은 것들 말이다. 책 좀 읽은 사람이라면 무아(無我)를 입버릇처럼 되뇐다.그 말은 곧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 無我를 말하면서도 생각도 하고, 화도 내고, 탐욕도 일으킨다.참으로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나는 無我를 반대하는 사람이다.그것을 믿는 사람이 수억 명이고 위대하다는 성인의 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생각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내가 존재하는 근거는, ..

가상화폐의 가치가 다락처럼 오르고 있다.아직도 그것이 거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그것이 가상화폐 가격이 오르는 이유다.곧 메타버스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기대한다.메타버스는 meta(가상; 초월)와 universe(세계; 우주)의 합성어다. 이제 가상과 현실이 동의어가 되는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이 되고 있다.비록 그것이 허구(虛構)라 할지라도, 절대다수의 사람이 진실로 대접하면 그것은 진실이 된다.혼자 동떨어져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 세상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오늘날만 그런 것은 아니다.역사를 보면 언제나 그래 왔다.하지만... 하지만 말이다.언제까지나 속아서만 살 것인가?장자(莊子)는 자기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나서 나비가..

자아(自我)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자아는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 사람은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단전(丹田) 역시 자아와 마찬가지고, 기(氣)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 역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있다. 단전은 블랙홀과 화이트홀 두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그곳을 에너지(氣) 창고로 쓰며, 그곳에 에너지를 모으기도 하고, 배분하기도 하고, 흐르게 하기도 한다. 단전을 모르는 사람, 단전이 생성되지 않은 사람에게도 에너지는 있다. 하지만 그의 에너지는 종잡을 수 없이 기분(氣分)에 따라 좌지우지한다. 그에겐 단전의 중심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단전은 자리 잡기 좋은 자리에 자리 잡는다. 하지만 우리 몸 어떤 자리라도 단전의..

자기를 고정화하지 말라.고정화하는 순간, 진화(進化)는 정지한다. 다가와 주는 모든 것들을 수용하라.존재(existence)란 계속해서 변하게 되어 있다. 언제든 내가 믿고 있는 것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라. 더 이상 의심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무아(無我)와 자아(自我)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존재(存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나’는 실재한다. 그리고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 왜 ‘나’ 말고 진아(眞我)라는 말을 끌어와야 하는가? 그것으론 부족한가? 지금 이 ‘나’는 허깨비인가? 아니면 없애야 할 대상인가? 누가 뭐라고 말해도 여기 ‘나’는 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고,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 이렇게 성성(惺惺)하지 않은가? 인식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여기 있다.

물질(몸)에만 치중하지 말고, 마음(神)만이 최선이라 하지 말라. 물질(돈) 우선의 사람을 저질이라 하고, 마음만 생각하는 사람을 저질이라 한다. 몸과 마음의 중간에 氣가 있는 정기신(精氣神)이 구족되어야 산 사람(生者)이다. 우리가 선도를 닦는 이유는, 기운 없이는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만 있는 것을 시체라 하고, 마음만 있으면 귀신이라 한다. 몸과 마음에 기운이 막히지 않고 잘 흐르는 사람이라야 건강하다.

인간은 존재(存在)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비존재, 즉 없는 것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은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그 생각을 발전시켜 세계관을 만든다. '있음'이 없이 우리는 무엇도 생각할 수 없고,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것은 '존재'이다. 있는 것을 있음의 차원에서 주목하는 사람을 가리켜 '존재자'라 부른다. 세상만사는 있음으로만 존재한다. 없는 존재자는 세상에 없다.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이 존재자가 되기 때문이다. 존재란 변화하고 있는 것의 근저(根底)에 있으면서 자체적 변화는 겪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실체(實體)라 부르며, 그것은 다른 있는 것들보다 먼저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제1 원인이라 부른다. 무아(無我)란 가상(假像)이다..

이루어도 이루어도, 가져도 또 가져도, 늘 허전함이 남는 사람, 늘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 사람, 노령(老齡)이나 지병(持病)으로 여생(餘生)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 자각(自覺)이 진정으로 절실한 사람... 그런 사람이 道에 입문하면 어렵지 않게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무엇보다 깨우치는 공부에 심혈을 기울일 테니 말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더 얻을 것이 있고 지킬 것이 많은 사람, 배운 것이 많아 말과 글에 의미를 두는 사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이라 믿는 사람, 지금 이렇게 사는 것 외에 별다른 것이 있나? 하는 사람에겐 견성(見性)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깨달음이란 일 없는 사람들의 놀이처럼 보일 겁니다. 마치 구름 잡는 일처럼 실익(實益)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