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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자기를 고정화하지 말라.고정화하는 순간 진화(進化)는 정지한다. 다가와 주는 모든 것들을 수용하라.존재(Existence)란 계속해서 변하게 되어있다. 언제든 내가 믿고 있는 것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라. 더 이상 의심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무아(無我)와 자아(自我)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존재(存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나’는 실재한다. 그리고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 왜 ‘나’ 말고 진아(眞我)라는 말을 끌어와야 하는가? 그것으론 부족한가? 지금 이 ‘나’는 허깨비인가? 아니면 없애야 할 대상인가? 누가 뭐라고 말해도 여기 ‘나’는 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고,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 이렇게 성성(惺惺)하지 않은가? 인식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여기 있다.
물질(몸)에만 치중하지 말고, 마음(神)만이 최선이라 하지 말라. 물질(돈) 우선의 사람을 저질이라 하고, 마음만 생각하는 사람을 저질이라 한다. 몸과 마음의 중간에 氣가 있는 정기신(精氣神)이 구족되어야 산 사람(生者)이다. 우리가 선도를 닦는 이유는, 기운 없이는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만 있는 것을 시체라 하고, 마음만 있으면 귀신이라 한다. 몸과 마음에 기운이 막히지 않고 잘 흐르는 사람이라야 건강하다.
인간은 존재(存在)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비존재, 즉 없는 것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은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그 생각을 발전시켜 세계관을 만든다. '있음'이 없이 우리는 무엇도 생각할 수 없고,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것은 '존재'이다. 있는 것을 있음의 차원에서 주목하는 사람을 가리켜 '존재자'라 부른다. 세상만사는 있음으로만 존재한다. 없는 존재자는 세상에 없다.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이 존재자가 되기 때문이다. 존재란 변화하고 있는 것의 근저(根底)에 있으면서 자체적 변화는 겪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실체(實體)라 부르며, 그것은 다른 있는 것들보다 먼저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제1 원인이라 부른다. 무아(無我)란 가상(假像)이다..
이루어도 이루어도, 가져도 또 가져도, 늘 허전함이 남는 사람, 늘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 사람, 노령(老齡)이나 지병(持病)으로 여생(餘生)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 자각(自覺)이 진정으로 절실한 사람... 그런 사람이 道에 입문하면 어렵지 않게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무엇보다 깨우치는 공부에 심혈을 기울일 테니 말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더 얻을 것이 있고 지킬 것이 많은 사람, 배운 것이 많아 말과 글에 의미를 두는 사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이라 믿는 사람, 지금 이렇게 사는 것 외에 별다른 것이 있나? 하는 사람에겐 견성(見性)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깨달음이란 일 없는 사람들의 놀이처럼 보일 겁니다. 마치 구름 잡는 일처럼 실익(實益)이..
태어나는 순간, 생존 의식 외에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오직 생존을 위해 더 유리한 것만을 구하도록 조정되어 있다. 생각과 행동 역시 그것에 의해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젖을 빠는 것으로 시작되어 그 일은 평생동안 지속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무엇이 지금의 나에게 더 유리한가에 기초하여 그에 준한 말과 행동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 신앙이란 것도 별것이 아니다. 신앙 행태를 보라. 겉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외칠지 몰라도, 그 뒤를 보면 이기주의와 반목, 폭력이 난무한다.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믿음이 다소 제 자리를 찾기도 하지만, 절대다수의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진리인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나는..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선사(禪師)는 "이것뿐"이라는 답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고(苦)로 점철된 일상생활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하다는 뜻은 모든 것이 "헛것"이라고 부언하였고, 그것을 이해하므로 모든 고통을 넘어선다(度一切苦厄)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空이란 말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헛것" 내지는 "텅 빈 것"으로 이해하면 삶이 허망(虛妄)해집니다. 空이 비어있는 것으로 보여도 에너지(氣)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의 조화에 의해 세상과 그 안에 속한 모든 것들을 일어나고 꺼집니다. "어떤 法도 세우지 마라. 오직 中道"를 설파하던 인사(人師)도 배고픈 것 못 참고, 독감 걸리면 "아이구, 죽겠다" 합니다. 탁상공론(卓上空論)은 관념(觀..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겠습니다. 그것이 큰 파급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2500년 전 시타르타의 "무아(無我)"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매우 시끄럽습니다. 그의 "연기(緣起)"라는 존재관(存在觀)에서 비롯하여 본래면목(本來面目)도 사실은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주장이 생겨났습니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는 논리(論理)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들리면, 일단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은 또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무아(無我)는 유아(唯我), 즉 진아(眞我)의 반증이 아닐까요? 죄 있다고 결론을 먼저 내리고 추궁하다 보면, 결국은 무죄(無罪)도 유죄(有罪)가 되고 마는 것이 세상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가설은 가설일 뿐입니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데카르트의 가설이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것을 있게 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가설(假說)에 기초하여 인간들은 각기 자기 입맛에 맞는 神들을 조작(造作)하고 그것들을 우러르며 믿는다(信仰). 심지어 불교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를 주장한 시타르타마저도 신격화(神格化)하여 그의 상(像)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고 있다. 생각이 없다면 과연 나는 없을까? 미미하고 무어라 말하기는 어려워도 생각이 없다는 것,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챈 '그놈'은 끝까지 남지 않던가? 그것을 알아챘다면 당신은 문 하나를 통과한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것이 진정 없다면(無我), 무엇이 윤회(輪廻)하는가? 이것에 똑 떨어지는 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불교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었지만, 시원한 답은 나오지 못했다. 석가는 제자들에게 윤회에 대해서 재론치 말라고 명령했다고 하는데 의미심장하다. 석가모니 재세 시, 윤회는 민중의 상식이었다. 윤회는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의 움직일 수 없는 신앙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무아(無我)와 윤회는 모순이다. 알쏭달쏭하게 설명 할 수밖에 없다. 윤회 신봉자들, 그들의 변을 한번 들어보자. * * * * *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연기(緣起)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연이면서 동시에 필연이다. 존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사라진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알 수 없어도 말이다. 윤회(輪廻)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