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12. 성명쌍수 (Soul needs energy) (8)
谷神不死
이치(理致)만 알았다고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에너지(氣) 공부까지 마쳐야 합니다. 그래야 이기일원(理氣一元)이며, 그리되어야 무병장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生死一如) 말이 있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는 말도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건 틀림없지만, 그래도 전염병으로 죽을 수는 없지." 많은 이로부터 깨달음을 칭송받던 분이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만나기로 해놓고 날짜가 되자 나에게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도통(道通)보다 한 계급 더 높은 것이 코로나였든가 봅니다. 사실 전염병이 돈다고 다 죽는 건 아닙니다. 살 사람은 살게 되어있습니다. 6.25 때 우리 동네에서 태어난 아이 10명 중 8명이 홍역 마마로 죽었지만 저는 용케 살아남았습니..
성명쌍수(性命双修)란, 성(性)과 명(命)을 동시에 닦아간다는 선도(仙道) 용어이다 性이란 깨달음의 자리, 즉 본성(本性)을 말하며, 命은 목숨과 사명(使命), 즉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 세계를 말한다. 불도(佛道)는 性을 중심으로 닦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허망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仙道는 다르다. 희노애락(喜怒哀樂), 먹고, 자고, 쉬고, 놀고, 즐기는 생생한 이 삶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仙道는 견성(見性)을 따로 강조하지 않고, 命 공부 중심으로 공부를 지어간다. 性 공부를 중시하지 않는 이유는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命 공부를 진행하는 가운데 깨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담박 밝아 보여주는 것이 자성(自性)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命 공부(백일축기, 시월양태)는 상당한 시간이 ..
견성(見性)을 하고 나면 편안해집니다. 그 후에는 더 알아야 할 것도, 얻어야 할 것도 없음을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가끔,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이 세상을 비관(悲觀)하여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어떠한 관(觀)을 가지고 사느냐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자유입니다만... 見性을 했다고 하는 이들 중 일부는 명(命) 공부, 즉 에너지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생사(生死)의 자유도 얻었으니(究竟涅槃), 구구한 삶에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며 은근히 기(氣) 공부하는 선도인(仙道人)을 비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깨달음만으로 끝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모두라면 보시(布施)는 왜 필요하며, 지계(持戒) 인욕(忍辱)은 무엇에..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산상수훈(마태 5장)에 예수의 말이다. 이 말대로라면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장님(盲人)이 되어 있을 것이다. 오른쪽 눈만으로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슨 뜻인가? 누구들처럼 비겁하게 책임 미루기(꼬리 자르기) 하란 말인가? 그 말도 아니다. 오른 눈이 무슨 죄인가? 오른 눈은 아무 죄도 없다. "죄를 미워해야지 사람은 미워하면 안 된다." 정말로 웃기는 말 아닌가? 죄가 무슨 죄가 있는가? 사람이 죄가 있는 것이지. 혹시라도 눈이 죄를 지었다면 그 말은 그 눈의 주인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고, 최소한 마음이란 것이 죄를 조장한 것이라 봐야 한다 그 말의 진정한 뜻은 자기를 들여다보고 심보를 고쳐먹으라는 것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
체(體)와 용(用)은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체가 없는 용은 따로 존재할 수 없으며, 용이 없는 체는 체라고 할 수도 없다. 이(理)와 氣도 마찬가지다. 이(性)가 없이 氣는 작용할 수 없으며, 氣의 작용이 없는 성품(性品)은 무용지물이다. 깨우침이 없이 氣만 닦는다고 안정이 올 수 없으며, 아무리 큰 깨우침이 있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해 줄 에너지가 없다면 허망함만 남을 것이다. 견성(見性)을 이루었다면 氣 공부에 힘써야 하고, 氣를 알았다면 그것이 밝음(깨달음)으로 이어지도록 생각들을 정리하여야 한다. 새가 한 날개로만은 날 수가 없듯이, 理와 氣의 관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목적지에 이르렀는데, 눈을 뜨고 보니 출발했던 그 자리였더라." "복숭아를 찾아 온 산을 뒤졌는데, 집에 와보니 앞마당에 복숭아 꽃이 피었더라." 그렇더라도... 먼 길을 돌고 돌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가 그 자리란 것을 어찌 알았겠으며, 온 산을 뒤지지 않았다면 앞마당 복숭아 나무 귀한 줄을 어찌 알았겠으랴 ! 무턱대고 '깨달음은 없다'라는 망발(妄發)로 순진한 중생들 헷갈리게 하지 말고, 그냥 가는 놈은 순하게 가게 하고 오는 놈은 조용히 오게 할 일이다.
성공(性功)을 마음을 닦는 공부라 한다면 명공(命功)은 몸을 다스리는 공부이다. 성공의 목표가 사람이 갖추고 있는 불변의 본질을 닦아서 밝은 지혜, 즉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 한다면 명공은 생명 활동의 제1원을 찾아 그것을 키우고 다스려 깨우침을 완성하는 것이 최종의 목표이다. 성명(性命)의 일반적 오류에 대하여 세 가지로 정리해 보도록 한다. 첫째, 정신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보는 사상이 만연되어 있다. 동양사상은 그 둘을 근원적으로 하나(不二)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과 명을 처음부터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도식(仙道式) 사고방식은 아니다. 둘째, 앞에서처럼 육체와 정신의 훈련이라면 심신쌍수(心身双修)라 할법한데 각기 선천적(先天的) 원인(原因)이 되는 성명(性命)이라는 납득키 어려운 말..
앞서 기술했듯이 성(性)과 명(命), 그 둘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속에 있다. 성은 그것의 유지를 위해 명에 의존하고 있으며, 명은 성이 함께 할 때만 존재한다. '성'이란 선천적 마음, 즉 사람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변의 본질이며, '명'이란 생명 활동의 제1 원인으로서 사람이 살기 위한 바탕이 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도(仙道)에서 남다르게 강조하는 것이 성명쌍수(性命双修)이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가 서로 보완하는 생명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수행자는 그 둘은 동시에 닦아야 한다. 이 양자 중 어느 쪽이건 미흡하면 나머지 한쪽도 제 기능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명을 하나로 보고 수련한다. 성명쌍수란 성명(性命)을 하나로 보고 수련을 지어가는 것이다. 어느 한쪽만을 중시하고 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