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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불교에는 '삼특상(三特相)'이란 것이 있으며, 교리(敎理)의 중심입니다.그것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입니다.우리는 그중 하나, '무상(항상 하지 않음)'만 이해하면 됩니다.삶의 모두가 고통(一切皆苦)이라지만, 그것 역시 무상을 이길 순 없습니다.그리고 '나 없음(무아)'은 다툼의 여지가 많으니 무시해도 무방합니다.무상은 진리랄 것도 없고, 공부(수행)할 필요도 없습니다.조금의 관찰력만 있으면 누구나 이해가 가능하니 말입니다.문제는 무상이란 말이 거의 부정적으로만 쓰인다는 것입니다.'인생무상'이라느니 하고 말입니다.하지만 무상은 긍정적(희망적)으로 쓰여야 합니다.세상에 좋게 변하는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항상 하는 고통은 세상에 없습니다.똑똑해져야 합니다.모르면 속고, 손해 봅니다.

무아(無我), 즉 '나는 없다'를 주장하는 사람은 "무상(無常), 즉 계속 변하는 가운데 무엇을 '나'라 할 것인가"라고 합니다.그들은 또 주장하기를, "세상은 저절로 보이고, 저절로 들리고, 저절로 느껴진다"라고 합니다.주체(主體)가 없이 말입니다.여기 자동감지장치가 있습니다.그것으로 저절로 불이 켜지고, 문이 열리고, 에스컬레이터가 작동됩니다.하지만 그것이 Off 되어 있다면, 그 장치에 전원(에너지)을 연결하지 않아도 그 장치가 저절로 작동될까요?無我라는 것을 감지하는 무엇이 있고, 無我를 주장하는 놈도 있습니다.그것은 누구입니까?그것을 이름하여 진공묘유(震恐妙有)라고 하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원천을 氣라고 합니다.

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내가 있기에 세상이 있고, 아름다움도 있습니다.'나를 모른다(잃어버렸다)'는 사람이 많습니다.그것을 찾기 위해 세상을 등져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여기 이렇게 있는 '나'를 두고 말입니다.지금 여기 이렇게 알아차리고 있는 '이놈'이 내가 아니면 무엇이 '나'겠습니까?너무나 당연해 모두 관심조차 두지 않고 살지만 말입니다.나는 내가 있어서 행복합니다.내가 없으면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요, 들어도 듣는 곳이 아니요, 냄새도 없고, 맛을 알 수 없으며, 알아챌 수도 없습니다.왜 그(싯다르타)는 "나는 없다"를 주장했는지 짐작은 합니다.그의 주제는 '괴로움(苦)'이었습니다.그는 남들과 달리 병듦과 죽음이 두려웠고, 그것이 큰 고통이었습니다.죽음은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들어 버리기 ..

보는 자가 나인가? 보여지는 대상이 나인가?수없는 생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그리고 그것들을 알아채는 놈이 있다.생각에도 즐거운 생각과 그렇지 못한 생각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즐거운 생각은 살리고, 괴로운 생각은 사라지게 하고 싶다. '무아(無我)'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 몸과 생각을 '나'라고 믿으려는 것 같다.명상 중 생각과 몸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내가 없는 증거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우리에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이 있지만, 보는 자, 듣는 자, 느끼는 자가 있다.나는 누구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그 말을 한 그 사람을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면, 생각을 안 하고 멍하니 있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요즘 유행하는 멍때리는 것은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 아닌가?참선이나 명상 같은 것들 말이다. 책 좀 읽은 사람이라면 무아(無我)를 입버릇처럼 되뇐다.그 말은 곧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 無我를 말하면서도 생각도 하고, 화도 내고, 탐욕도 일으킨다.참으로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나는 無我를 반대하는 사람이다.그것을 믿는 사람이 수억 명이고 위대하다는 성인의 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생각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내가 존재하는 근거는, ..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를 아시는지요? 속아서 정신병 환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남들 말만 듣고 어찌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모를 수 있을까요? 반면에, 엄연한 자기를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먹고, 자고, 이것저것을 소유하려 하면서 말입니다 누구라도 하루만 굶어보면 압니다. 자기가 있는지... 없는지... 옷 입지 않고 5분만 거리에 나서 보면 압니다. 과연 자기가 허깨비 같은 존재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붓다가 말한 "무아(無我)"는 진짜 이 몸과 마음이 없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중생들이 너무나 자기에만 집착하느라 고통 속에 사는 것이 안쓰러워 한 말일 것입니다. 그러다 자기도 속았는지 모르고 말입니다.

만약에 하느님이 실재(實在)한다면, 그의 뜻을 따라 살면 될 것이다.간단한 일이다.하지만 그가 있는지 또한 그의 뜻은 알 수 없다.사람마다 다르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諸法無我)"면, 아무런 일도 할 필요가 없다.무언가를 믿을 필요도, 애써 수행할 필요도 역시 없다. 문제는 '나'라는 것이 있을 때 생긴다. 그때 우리는 복잡해진다.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관리해야 한다.거기서 수행(修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몸과 마음, 그리고 그 둘을 작동시키는 에너지(氣)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정기신(精氣神)이라고 한다. 인생이라는 것이 일정 시간 살고 마는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각자 좋은 대로 살다가, 미련 없이 떠나면 그만이기 때..

유(有)가 없이 무(無)는 존재할 수 없다. 무는 유를 근거로 존재하며, 절대무(絶對無)에서는 무를 알아차릴 근거조차 없기 때문이다.무를 주장하기 위해서 유를 삭제할지라도, 그곳엔 유의 흔적이 남아 유를 증명한다.'무아(無我)'란 싯다르타가 만든 다분히 조작적인 말이다.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나'라고 하는 것을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내가 있는 한, 고(苦)는 영원히 존재한다.고와 낙이 하나임을 알지 못하는 한 말이다.아무리 無我를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나(自我)'는 존재한다.無我 역시 내가 있어야 말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絶對無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살아있는 한, 그 뒤엔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내'가 있기 때문이다.

무아(無我)와 자아(自我)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존재(存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나’는 실재한다. 그리고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 왜 ‘나’ 말고 진아(眞我)라는 말을 끌어와야 하는가? 그것으론 부족한가? 지금 이 ‘나’는 허깨비인가? 아니면 없애야 할 대상인가? 누가 뭐라고 말해도 여기 ‘나’는 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고,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 이렇게 성성(惺惺)하지 않은가? 인식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여기 있다.

싯다르타는 명쾌했다. 그것이 그의 위대성이다. 그는 무상, 고, 무아라는 간단한 이치를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만 살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무상(無常)이 고(苦)를 낳지만, 무아(無我)라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불교는 너무 복잡하다. 파벌도 파벌이지만, 가르침도 상이하다. 간단히 無我라 알고 살면 쉬울 것을, 힌두로부터 진아(아트만)와 윤회를 끌어들인 것으로 부족해, 용수(龍樹)의 중관(中觀)에 요가로부터 유식학(唯識學)까지 가져왔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신앙할 것인가, 아니면 풀리지 않는 미궁(迷宮) 속에서 쉼 없이 허덕일 것인가라는 기로(岐路)에 서야 한다. 진리는 쉽고도 명료해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