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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지혜로운 자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을 욕망하고,어리석은 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한다.그런 연유로, 지혜자는 늘 행복하고, 바보는 늘 불행하다.우리의 제1의 과제는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다.제1의 지혜자는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자이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자는 끝없이 욕망하거나, 욕망을 포기한다.그것은 그를 외롭게 하고, 우울하게 한다.지혜자는 아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그는 아는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도록, 가고, 또 간다.지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지는 것이 아니다.읽고, 읽고, 또 읽고, 그래도 부족하면 지혜자 앞에 앉아 듣고, 듣고 또 들어야 한다.

곧 AI는 판사가 하는 일을 하고, 의사 일을 하며, 설계와 회계사 일을 하며,행정과 군사를 통솔하며, 온갖 창조적 작업을 하는 놀라운 세상이 올 것이다.하지만 AI는 우리에게 항구적 행복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잠자는 단전(丹田)을 깨우지도 못할 것이고, 깨달음(見性) 또한 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니 말이다.단전과 깨달음은 누구라도 대신 해줄 수 없다.자기만이 해결이 가능한 일이다.자기 스스로 자기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깨달음 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어느 정도 논리(이치)에 밝아야 한다.먼저 왜 깨달아야 하는지가 머리로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첫 스텝이다.다음은 그것을 가슴속에 새겨지게 해야 한다. 아니면 맹탕이 되고 만다. 수행이 답보 상태가 되는 이유는 가슴에 맺힘이 없기 때문이다.최종적으로 복뇌(腹腦), 즉 단전(丹田)이 도와줘야 한다. 단전에서 마무리가 지어지지 못하는 한 진리는 결코 자기 것이 될 수 없다.선도(仙道)에서 단전... 단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늙은이가 부리는 욕심을 노욕(老慾)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모아둔 재산을 가는 길에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에 열심인 것은 노욕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깨달음(見性)과 소주천(小周天) 수행에 열심인 것은 노욕이라 하지 않습니다. 노욕은 필요합니다.하지만 늙은이가 더 많은 돈을 가지려 하고,권력 자리다툼을 하는 노욕을 부려선 안 됩니다. 아무리 100살까지 살게 되었다지만,70이 넘으면 세상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늙은이가 욕심을 부리면 매우 추(醜)해 보입니다.그동안 못한 일을 해야 합니다. 노욕은 필요합니다.하지만 진정으로 자성(自性)을 깨우치기 위한 노욕을 부려야 합니다. 물론 소주천(小周天)이 더 필요하지만, 정성이 더 요구됩니다. 70이 넘으면 40대보다 3배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타인의 깨달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는가?어찌 자신의 "신앙(독선)"으로 타인을 재단할 수 있단 말인가?계율을 강조하는 고집스러운 사람들을 본다.그때 상황에 맞춰 만들어진 계율을 어찌 21세기에도 고집할 수 있는가?"깨달음"을 논하려면, 교리의 기준에 앞서 "무엇을 깨달음이라 하는가"에 대해 먼저 정리하고 시작해야 한다.깨달음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주제여야 한다.자기가 누군지부터 분명히 알아채야 한다는 말이다.타인의 신앙 기준에 맞출 필요는 없다.하루하루 걸림 없는 삶이 이어진다면, 늘 무위자연 속에서 만족하며 산다면, 난해한 교리를 모른다 해도, 누가 그의 깨달음에 토를 달 수 있을까?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었고,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몰라도, 늘 자기를 인식하면서 산다면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세상에 고정된 것은 없다.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것들을 머리에 새기려 애쓰는가?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하지만, 그 대상이 "자기(自己)"일 경우는 분발해야 한다.자기가 누구인지엔 관심 없고, 힘으로 대상을 지배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짐승살이와 다를 바 없다.하등동물일수록 그리하며 살기 때문이다.

신앙(信仰)은 이성적이지 않다.논리적이지도 않다.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이성과 논리를 잠시 차용한다. 이성과 논리가 개입하면 신앙은 힘을 잃는다. '신학(神學)'이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 신(神)은 학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지면 따질수록, 神(?)은 인간들에게서 멀어진다.그 이유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단체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들이 이성적(理性的)으로만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理性)은 늘 부족함을 느끼며, 무언가가 그것을 채워주기를 바란다.비논리적이지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진복자(眞福者)", 그리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을 종교라고 믿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인간이 동물처럼 된다. '..

당신이 진정으로 깨달음을 원하는가?그렇다면 진정으로 그것을 원해야 한다.무엇보다 그것이 우선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다음에야 깨달음이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살아 있는 한 먼저 해야 할 일들이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물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마찬가지다.그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 한 그것들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진정 깨달음을 원한다면 먼저 그것의 가치부터 가늠해 보아야 한다.있다면 좋고,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면, 그저 엉거주춤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도(仙道)를 닦는 사람이라면 일차 목표를 소주천(小周天)에 두어야 한다.소주천을 빼고 선도를 논할 수는 없다.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한다.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루어지는 일에..

사람들은 돈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또한 늙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돈이며,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노후대책이라고 말한다. 조금 깨어 있는 사람은 잘 먹고 운동을 잘해야 건강하다고 말한다.하지만 먹어서 병이 되기도, 하고 맞지 않는 운동을 하면 몸을 다친다. 바람직한 것(일반인 입장에서)은 죽는 그날까지 남의 신세 안 지고 살다가,나이 들어 조용히 숨을 내려놓고 영면(永眠)하는 것이다. 수행자라면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이 자기를 알아채는 것(깨달음)이다. 그리고 죽는 그날까지 에너지(氣)를 잃지 않는 것이다. 바르게만 지도를 받으면 죽는 순간까지 에너지를 지닐 수 있다. 자기의 정체성을 알아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에너지만 잃지 않는다면 정체성 역시 잃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

한국의 사찰을 방문한 티벳의 고위 승려(僧侶)에게 한국 불교(看話禪)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목표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에 티벳 승려는 밝은(놀란) 웃음을 지으면서 정말로 수승(秀昇)한 수행법이라는 찬사의 말을 했다고 한다. 잠시 후 티벳 승려는 "그런데 여기 있는 스님들 가운데 몇 분이 깨달음을 얻었느냐"고 물었는데, 그곳에는 고개를 들고 상대를 직시하는 중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전언(傳言)이 있다. 문제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깨달음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놓는 것이 순서다.그것을 뒤로 미루고 깨달음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망발이다. 깨달음에 대해서는 각자가 구구한 사견을 가지고 있겠으나,불교(佛敎)를 이야기하는 자리인 만큼 고집멸도(苦集滅道)가 중심이 되어야 하므로,고(苦), 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