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6. 무아론 (Anatman) (11)
谷神不死
아난다(Ananda)는 석가(釋迦)의 사촌 동생으로 그의 시자(侍者)로 일하며 가장 많은 설법을 들어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했답니다. 대부분의 초기 경전이 그의 기억력에 힘입어 결집(結集)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석가의 말을 모두 외울 정도로 영특하였으나, 실제로는 깨닫지 못해서 붓다 입멸(入滅) 후 상당 기간 소위 '아라한'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고 합니다. 심심치 않게 "고통은 있어도 고통받는 자는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관찰해보면 우리처럼 고통받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어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이 더 심한 듯도 보입니다.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뻔히 아픈 것을 두고 '안 아프다'를 외운다고 하여 ..
"불교와 힌두교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힌두교와 불교는 인도라는 동일한 토양에서 싹이 트고 자라났다. 힌두교는 불교가 쓸고 간 자리에 먼저 있던 브라만교의 후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불교는 석가모니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초장(初場)부터 브라만교의 움직일 수 없는 '아트만(Atman)'설을 반박하는 무아(無我)설을 내놓으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힌두교와 불교는 거의 비슷하다. 나머지는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윤회(輪迴)에 대해서 우선 다루어보기로 하자. 석가모니의 주장처럼,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윤회(輪迴)하는가?"라는 질문에 오늘날 불교학자들은 무아론(無我論)적 윤회(輪迴)란 아리송하고 어려운 주장을 한다. 무아(無我)는 맞지만, 윤회(輪回)도 한다는 것인데..
힌두교와 불교(佛敎)는 '나'라고 하는 영구적 실체(實體)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이 가능하다. 깨우침을 얻은 싯다르타는 "항상(恒常) 하는 것은 없다(無常)"에 이어,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無我)"를 설했으며, 그것은 브라만교를 비롯해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던 아트만(Atman) 영구불변설(說)을 뒤집어엎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면 윤회설(輪迴說)은 단지 설(說)로만 끝나고 말 일이었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입멸(入滅)한 후, 인도의 거의 모든 불교신자는 다시 브라만교에서 개명(改名)을 한 힌두교로 개종(改宗)하였으며, 불교는 인도 밖으로 옮겨갔다. 성경(the Holy Bible), 특히 구약(舊約)을 보면, "영혼은 죽으며(에스켈 18:4)", "온유한 의인들은 천당이 아니라 ..
자성(自性) 자리에 대한 체험도 분명하지 않으면서 단지 책이나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서 깊은 고찰(考察)도 없이 듣고 읽은 이야기를 꿰어맞춰 존재(存在)에 대해 무(無)니, 유(有)니,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 몇 편을 본 후 일어난 환(幻) 체험을 깨달음으로 오인하여 깨달은 사람 행세를 하며 남을 가르치려 한다면 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 에고(ego)에 취해 궤변(怪變)을 늘어놓으면서 논리적인 이야기는 모두 거부합니다. 그런 사람과는 섭섭하더라도 대화를 중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 낭비이니 말입니다. 자기의 독선적(獨善的) 이야기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적반하장격으로 모든 이가 틀렸다고 몽니를 부리기도 합니다. 무아(無我)에 대..
問: 깨달으면 운(運)이 바뀐다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았기에 운이 바뀌는 것입니까? 운이 바뀌었기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答: 그 질문은 인과(因果)만 생각하고 연기(緣起)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과란,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난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저런 결과가 생겨난 것을 말하는 one way입니다. 하지만 연기란 쌍방통행입니다. A가 있으므로 B가 있고, B가 있으므로 A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연기입니다. 즉, 깨달음은 도통운(道通運)이 없는 사람에게는 일어나기 어렵지만, 반면에 깨달음 인연이 왔다는 것은 도통운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도통(道通) 공부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도통을 해버리면 그것이 바로 도통운이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르..
깨달음을 얻고 나면 자유로움 속에서 거리낌 없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근심 걱정이 가라지고, 고통에서 벗어나 삶을 만끽하게 됩니다. 깨달은 것은 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란 것을 철저히 깨우친 것이므로, 그다음부터는 걱정이 되기는 하는데 걱정하는 놈이 없고, 괴롭기는 괴로운데 괴로운 자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걱정하는 자가 없다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철저하게 규명해야 합니다. 보는 자가 없다면 어찌 보이는 대상이 있겠으며, 듣는 자가 없는데 어찌 들리는 대상이 존재하겠습니까? 근심 걱정인들 어떻게 혼자서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걱정은 걱정이 아니고,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게 됩니다. 텅 빈 속에 영성(靈性)만이 여여(如如)합니다.
보는 자와 대상(對象)은 둘이 아니다. 그 둘은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주체(主體)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엄연히 그것들은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작용에 의해 그 둘은 동시에 생겨나고 사라지는데, 선도(仙道)에서는 그것의 주체를 기(氣)라고 한다. 氣가 없이는 주체가 있기는 있되 주체라 할 수 없고, 대상이 있기는 있되 대상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주체가 대상을 만날 때 그것을 알아채고 있는 묘(妙)한 것이 있는데 선가(禪家)에선 그것을 영지(靈知)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 뒤에는 그것을 작용시키는 에너지가 활발발(活潑潑) 하고 있다. 仙道에서 氣를 중시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작용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이는 무엇도 생..
초기 불교에 심취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는 '무아(無我)'이다. 반면, 힌두교와 대승불교 사람들은 '아트만(Atman)'과 '자성(本來面目)'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각자 자기주장이 옳다고 끝이 없는 논(論)을 펴지만, 과연 양쪽 모두 관념(觀念)의 한계를 벗어났는지는 의문이다. 이른바 무아론(無我論)과 진아론(眞我論)이다. 한쪽은 2500년 전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알려진 삼법인(三法印) 중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신봉하고, 다른 한쪽은 체험을 통하면 무아(無我) 그것을 알아채는 놈이 확연(確然)하므로 그것을 '진아(眞我)', 또는 '자성(自性)'이라고 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상호의 주장이 모두 일리(一理)가 있는 데다 첨예(尖銳)함으로 결론은 후일로 미..
이 몸과 이 마음은 "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이 몸과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놈이 바로 "나"입니다. 보고 있는 자, 듣고 있는 자, 느끼고 있는 자를 보려 하거나, 들으려 하거나, 느끼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그것에 "나는 없다(無我)"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