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虛其心 (213)
谷神不死
자기를 깨우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은 생각이 만드는 허깨비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무지(無知)함에서 비롯됩니다. 무지가 두려움을 부릅니다. 알고 있는 병은 病이 아닙니다. 알고 있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늘 깨우침의 자리와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붙지 않습니다. 그는 實在(에너지)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넉넉하고 온화합니다. 그의 마음속엔 긍정만 있습니다. 그에게는 부정이 와도 긍정으로 되살아납니다. 그는 언제나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삽니다.
무언가의 힘으로 세상이 멸망하여도 당신은 살아남을 것이라 믿는가? 사후(死後)에도 영혼(靈魂)은 죽지 않고 천당이나 지옥 등 어디론가 갈 것이라고 믿는가? 혹시 다른 어떤 생명체로 환생(還生)해 돌아올 것이라 믿는가? 혹은 부활(復活)하여 지상 낙원에서 살게 될 것이라 믿는가? 아니면 먼지처럼 사라져 '절대 무(無)'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가? 어떻게 믿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다. 그러나... 이리 믿었다, 저리 믿었다 하는 그놈이 누군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만이 유일하게 '실재(實在)'하며, 앞서 언급된 것들처럼 허구(虛構)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개벽(開闢)'이란 말은 활짝 열린다는 뜻이다. 우리는 개벽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동양에서 서양에서 수많은 ..
'비교(比較)'는 나와 그것, 나와 네가 다르고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나와 그것, 나와 네가 하나라는 것을 알아채면 비교는 사라진다. 비교는 지옥이다. 그것은 나를 분발시켜 다소 개선의 여지를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나를 힘들게 하고,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주범이 된다. 소식(消息)이 오면 비교하는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나와 세상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며, 내가 우주이고, 세상 모두가 나로 연유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훌륭한 것은, 세계 속에 내가 있고, 세계가 모두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대자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의 '환지본처(還地本處)'라고도 한다.
예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의 명령을 따라 서로 사랑해야(요한 13:34) 합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인연이 닥칠 때마다 베풀게(布施) 됩니다. 저절로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행하지(持戒) 않습니다. 또한 참아야(忍辱) 할 것은 참으며, 수신(修身)하는 마음(精進)을 늦추지 않고 살며, 늘 하느님을 만나며(禪定), 이치에 맞도록(智慧) 처신하며 삽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타인을 차별하지 않으며, 늘 그들 모두를 이해하려고 애씁니다. 그리하다 보면 예수의 가르침, 부활과 영생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은 지금 여기에서 천국, 극락을 즐기고 살게 됩니다.
순백(純白)의 화폭(畵幅)에 난초와 잉어와 호랑이가 그려지듯, 텅 빈 바탕 의식 위에 생각(顯在意識)이 일어나고, 꿈(潛在意識)이 피어나고, 깜깜 의식(無意識)이 나타난다. 그 묘유(妙有)한 바탕 의식을 가리켜 순수의식(純粹意識)이라 한다. 생각과 꿈의 내용이 바뀌고, 무의식이 현재 의식으로, 현재 의식이 꿈과 무의식으로 전환되지만, 순수의식만은 변함없이 늘 여여(如如)하다. 그 바탕 의식은 텅 비어 있고 고요하지만, 그 자리에서 너와 나, 세상이 일어나고 꺼진다. 그것은 모든 것의 시작(始作)이요, 끝판왕이다. 힌두 철학은 '순수 의식(Turiya)'만이 스스로 있는 실존(實存)이며, 영원하다고 단언한다. 그것을 제4 의식이라고도 하는데, 그 위에 현재 의식(the present consciousnes..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주체(主體)로 하여 사느냐입니다. 여자의 몸으로 처음으로 큰스님 소리를 들었던 비구니 대행(大行)은 늘 "주인공"을 主體 삼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주체사상(主體思想)이란 말은 터부시됐습니다. 북한에서 주체란 말을 그들의 권력자인 김일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은 무엇을 主體로 삼아 살고 있습니까? 돈이나 권력, 아니면 명성입니까? 아니면 민족이나 국가, 혹은 신앙이나 고정된 관념(良心)입니까? 아니면 가문이나 정당(政黨), 출신 학교, 나아가서는 가족이나 자식, 아니면 자기주장(자존심)이나 잘생긴 얼굴, 날씬한 몸매가 主體가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主體가 될 수 없고, 되어서..
'자아(the Self)'를 스스로 존재하는 "나"라는 의미의 자아(自我)라고 이해했다면 당신은 깨우쳤다 할 수 있다. 그 말은 대타적(對他的)인 것이 아닌, 즉 나와 너의 구별을 넘어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본 것이며, 그것이 바로 '자성(自性)'을 알아챈 것이다. 그 자리를 이해가 아니라 실지로 보게 된다면, 정신분석학의 에고(ego)나 슈퍼 에고(super-ego) 그리고 이드(id)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그것들이 나와 너를 구별하기 위한 對他的이 아니라면 나 중심(ego)이어야 한다던가, ego를 감시(super -ego)한다던가, 나를 충족시키는(libido) 욕망(id)은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무아(無我)라는 말은 보통 自我와 다른 말로 쓰이고 있으나, 그..
깨달음을 얻으면 세상 모두가 내가 됩니다. 이 몸과 마음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 안에 나도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때서부터는 사람이 변합니다. 진정으로 객관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전에 말했던 객관적이라는 말은 사실 포장된 주관적 의견에 불과합니다. 객관적으로 되려면 자기를 내려놓아야 하는데, 한 번도 자기를 내려놓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객관적이라는 말을 하려면 '견성(見性)'이 필요합니다. 한번 객관적으로 되어 보십시오. 그것보다 편안하고 행복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깨달음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은 '생각'이란 놈입니다. 생각을 빼고는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생각을 쉬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뻔하게 자성(自性)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쉬게 하기 위해서, 생각을 쉬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을 내려놓으려면, 마찬가지로 내려놓겠다는 생각이 또 필요합니다. 그러면 끝까지 생각을 쉬게 하지는 못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을 쉬게 하려면 먼저 생각의 속성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생각은 뿌리가 없으며, 실재하지 않는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 둘째,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생각은 혼자서는 일어날 수 없고, 견문각지(見聞覺知), 꼭 일으키는 대상이 있어야 ..
싱거우면 소금을 더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싱겁지 않고는 맛을 내기 어렵습니다. 모든 일은 싱거움(澹)에서 시작되며, 마침내는 싱거움으로 돌아갑니다. 담(澹)이란 글 속에는, "맑다", "싱겁다", "넉넉하다", "안존(安存)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싱거움에서 나와 싱거움으로 들어갑니다. 싱거움을 모르고는 무엇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담(澹)의 母字는 두꺼비(蟾)입니다. "두꺼비 파리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 뚝 따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도인(道人)은 담백(淡白)해야 합니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아야 합니다. 여유로운 두꺼비와 같아야 합니다. 수행자가 가장 먼저 도달해야 할 곳은 싱거운 자리(澹)입니다. 그 자리를 찾지 않고는 이어서 공부를 진행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