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2.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15)
谷神不死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 아버지 장사라도 지내고 스승을 따르겠다는 제자의 부탁에 대한 예수의 대답(마태 8:22)이다. 죽은 자가 어찌 장사를 지낼 수 있을까? 그 말은, 살아는 있되 세뇌(洗腦)에 의해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로봇과 같은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입력된 대로만 움직이는 답답한 사람을 가리킨다. 노지(老子)의 언급처럼 우리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을 만난다. 첫째, 道를 전하면 즉시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현명한 사람(聞道勤而行之), 그런 사람을 상사(上士)라 하고, 둘째, 부정하지는 않고 듣기는 하지만 이해가 늦고 갈팡질팡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聞道若存若亡), 그런 사람을 중사(中士)라 한다. 셋째, 道를 듣고는 자기의 기..

당신이 누군지를 알고 싶다면, 그동안 나라고 알고 살았지만 내가 아닌 것들을 모두 내려놓아 보세요. 우선 내 이름은 내가 아닙니다. 편의상 붙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누구의 자식이나 아버지,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직장에서의 나의 직책은 내가 아닙니다. 분류상 그리 부르는 것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몸과 마음마저 내려놓아 보세요.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자동차나 컴퓨터처럼 내가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하고 나면 오롯이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나" 곧 자성(自性)입니다. 내가 아닌 것들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모두 변합니다. 그러나 그것, "본래면목"은 변하지 않습니다. "나"를 찾고 나면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집착이 사라지고 건강해집니다.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신(神)이란 볼 시(示)와 납 신(申)의 복합으로 되어 있는 글자다. 그러므로 道 차원에서 해석하는 神은 신앙인들이 생각하는 神과는 전혀 다르며, 근소하지만 마음과도 다르다. 깨달음으로 해석한 神의 풀이는 다섯 개의 창문이 달린 방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示) 원숭이(申)이다. 선도(仙道)의 모든 행법은 시종일관 神과 氣를 한데 묶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오래전부터 그것을 장생불사(長生不死)의 근거로 삼아왔다. 죽음이란 혼비백산(魂飛魄散), 즉 정기신(精氣神)이 분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神을 영어로 굳이 표현한다면 Awareness, 즉 자각(自覺)이라 할 수도 있으며, 견성(見性)을 神과 연관하여 표현하면 神을 본 것 즉 性을 파악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기 위해선 생각들을 많이 비워져야 한다. 논리(..

깨어있음이란 시선(視線)이 자성(自性)에 머무는 것입니다. 듣는 것과 느낌들이 실재(實在)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관심사가 보이고 들리는 외부로만 향한다는 것은 잠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넉넉하고 지위가 높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삶은 허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왜 사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휘둘리기만 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번뇌가 없는 청정한 삶을 삽니다. 생각에 이끌려 살지 않고, 그것을 조종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바깥 경계에 휘둘리며 사는 삶은 내 삶이 아닙니다. 백 년을 살았다 해도 한순간의 꿈보다 못합니다. 깨달음은 특별한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것보다 더 큰 신통력은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자기 ..

마음을 운전하려면 운전자가 있어야 하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 차는 어느 방향으로 갈지 아무도 모른다. 마음을 운전하려면 먼저 그 운전자가 누구인지부터 알고 있어야 한다. 차는 운전자가 목표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깨달음, 즉 자각(自覺)을 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마음의 힘을 발휘하여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 마음의 주인이 누군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이를 확실히 검증하지 않으면 평생토록 안개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

믿고 싶은 것을 믿을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을 수 없는 사실(事實) 만을 믿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믿음이란 것은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과거에 있었다는 사건과 전혀 검증이 불가능한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절대성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현재 밖에는 없습니다. 과거는 영원히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실재(實在)하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 "나"라고 하는 이것뿐입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하늘, 땅, 세상 역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고 하는 이것이 모든 것을 재는 척도(尺度)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것에 근거하여 무엇인가를 믿든지 말든지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무엇을 나라고 할 것인가부터 바르게 정의 내려야 하며, ..
"만물박사(萬物博士) 집에 끼니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생활에는 적용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Bible을 늘 옆에 끼고, 불경(佛經)을 줄줄이 외우며 살아도, 자기가 부처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학식 많은 유대의 율법 학자들은 예수를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만 하느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몇십 년을 교리(敎理) 공부를 하고, 선방(禪房)에서 수십 철을 살았지만, 아직 깨달음 뒷다리도 못 잡은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너무 공부가 높아서, 아는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 학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믿음이 약하고, 그들 가운데 깨달은 이의 숫자는 "가뭄에 콩 나기"입니다. 가방끈이 짧다고, ..
재물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학문의 깊이가 아무리 깊어도,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혹시 만족스러운 일이 있었다 해도, 그 만족이 오래가지 못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주인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늘 사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언제나 얼굴에 미소가 그치지 않는 사람, 모든 일에 하나하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만약 보았다면 그는 깨달은 사람이다.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계합한 사람이다. 主人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재물이 넉넉하지 않고, 지위도 높지 않고, 학문도 크게 없어 보여도, 그는 늘 무언가 가진 것을 내어 줄 궁리만을 하며 산다. 그는 세상을 모두 가진 사람이다. 그 때문에 아주 만족..
무슨 옷을 입느냐, 무엇을 먹느냐, 어떤 집에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옷이 그 사람이 아니며, 먹는 음식이나 살고 있는 집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무슨 옷을 입든, 무엇을 먹든, 어떤 집에 살든, 이것들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만은 바뀌지 않습니다. 바로 그 사람을 찾아 그 사람(本來面目)과 친해야 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그것을 사용하여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사람의 모습을 지녔다고 모두 사람이 아니다. 매너리즘에 빠져 가진 것을 지키기에만 급급하고, 자기 정체성에는 관심조차 없이 산다면... 사람이라 하기가 좀 곤란하지 않을까? 불쾌할지는 몰라도 더 나은 것을 찾아 선택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지닌 神性에도 관심조차 없이 산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짐승도 먹고, 자고, 집 짓고, 먹을 것 모으고, 잘난척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