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3. 깨달음 (Enlightenment) (81)
谷神不死
깨달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수행자에게 있어 깨달음이란 “나는 누구인가?”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힌두(Hinduism)이든, 불교(佛敎)이든, 선도(仙道)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약간의 기법(技法)상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힌두들의 깨닫는 법은 보통 만트라(Mantra 또는 진언[眞言: 참된 말, 진실한 말, 진리의 말] 혹은 밀주(密呪) 또는 다라니(陀羅尼)라고도 하며 "영적 또는 물리적 변형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는 발음, 음절, 낱말 또는 구절)를 통해 사마디(Samadhi, 禪定, 三昧)를 체험함으로 신(神) 혹은 진리와 합일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힌두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방법론에 있어 다양한 방법을 구사합니다. 힌두처럼 만트라(呪力)를 사용하기도 하고 관법(觀..
불쾌한 일이 있을 때, 그 감정(感情)을 붙잡아 나와 동일시하게 된다. 즐거울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다. 체험도 감정도 그것이 나는 아니다. 깨달음의 체험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을 얻고도 우울한 사람이 있다. 십중팔구는 본인의 체험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얻은 것은 사라진다. 누구라도 깨달았다고 하면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준다. 헌데 왠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들이 자기의 깨달음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감정과 자기를 하나로 만들고 그 감정을 자기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싶으면 극장에 들어가야 한다. 그 영화에 평을 읽고 극장 앞만 서성인다고 그 영화를 보지는 못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
사람이 나머지 존재하는 것들과 다른 이유는 '사람다움' 때문입니다. 성경책은 사람만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 창세기 1:26) 사람에게는 나머지 것들과는 다른 특별한 기능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을 아는 기능'이라 하여 상위인지(Metacognition)라고도 부르는데, 즉 한 단계 높은 앎을 거두는 인지기능입니다. 불교(佛敎) 용어, 견성(見性)이라는 말은 너무나 타당합니다. 직역하면 "성품(性)을 마음으로 터득하다(見)"가 됩니다. 신기하게도 세상은 깨달을 수 있는 조건들로 가득합니다. 인간은 원래 깨닫도록 구조되어 있기 때문입니..
운전 실력보다는 길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운전 실력이 좋다 할지라도, 길을 모른다면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하겠는가? 세상엔 깨달음으로 가는 셀 수 없는 길이 있다. 하늘은 모든 이가 깨닫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깨닫기 위해 별짓을 다 한다. (물론 깨달음을 희구하는 일부 사람에 국한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딘가로부터 온다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구절(mantra)을 외우고, 우상에게 절을 하고, 단식(斷食)을 하고, 죽치고 다리 꼬고 앉아있고, 자해(自害)를 하고, 산(山)속에 들어가고, 인도 미얀마를 가고, 신앙 단체에 많은 돈을 바치고, 출가(出家)를 하고.... 그러나 그런 것을 통해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그런 짓을 통해 깨닫지 못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 소위 성인(聖人)이란 사람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구하면, 한결같이 "깨어있으라"고 말한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단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느끼지도 못하고 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그놈이 어디론가로 도망가 있다. 노오란 장미를 볼 때, 당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장미 자체를 보고 있지 않다. 당신은 당신에게 이미 입력된 장미의 모양, 물리의 작용에 의하여 나머지 색은 모두 흡수되어 버리고 반사되는 노란 색만을 본다. 중국인, 일본인을 볼 때도, "중국인은 지저분해", "일본인은 교활해"라는 당신에게 이미 이미지화한 중국인, 일본인을 당신은 본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살했다고 했을 때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전생(前生)도 후생(後生)도 아닌 현재..
늑대 소년 이야기가 있다. 늑대들에 의하여 성장한 한 소년이 인간 세상에 돌아와 일어나는 일들을 엮어낸 것이다. 본인이 늑대가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을 깨우쳤다고 해서 바로 그 즉시 모든 인성(人性)이 회복되지는 못한다. 제대로 숟가락질도 하지 못하고, 화장실 사용하는 법도 모르며, 보름달이 뜨면 뒷산에 올라 습관적으로 “우~” 하고 늑대 울음을 할 것이다. 내 주변에는 부모처럼 모시던 큰스님을 떠나 그가 열반(涅槃)하고 난 지금도 그녀의 법해(法解)에 대하여 의심한 나머지 심지어 ‘마구니’라고까지 부르는 불교 경전(佛敎經典) 연구가가 있다.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느냐고 그를 비난하기에 앞서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그녀의 깨달음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하..
깨달음이란 변치 않는 세계, 출세간(出世間)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관(觀)이라 하고, 다른 말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라 합니다. 무엇을 깨닫는가요? 1. '나(subject)'와 보이고 들리는 '대상(object)'이 둘이 아님을 깨닫습니다(頓悟). 2. '나(seer)'와, '지켜보는 것(scene)'이 둘이면서 둘 아님을 봅니다. 3. 오직 그 자리(본래면목)가 눈앞에 성성(醒醒)함을 봅니다. 4. 성(性)을 알았으니(見性), 명(命)을 닦으며 여유작작하게 살아갑니다(漸修). 그 자리(眞如)는 때가 묻지 않고, 상하지도 않으니, 닦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지켜볼 뿐입니다. 닦아야 할 것은 오직 이 몸(命) 뿐입니다.
분명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는 가르침이 있었어도, ‘담박 깨닫는다’고 말하면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각(角)을 잡고 오래오래 앉아 선정(禪定)을 유지해야만 깨달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생각이 바뀌기 전에는 깨닫기 어렵습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에도 선정(禪定)을 지혜(智慧)보다 앞서서 이야기하고 있고, 지관법(止觀法)에서도 관(Vipassana)의 앞에 지(Samatha)가 자리 잡고 있다고 고집 피우는 데는 달리 설명할 도리(道理)가 없습니다. 선정(Samadhi)을 말하자면, 보통 팔선정(八禪定)에 멸진정(滅盡定)을 추가해 구선정(九禪定)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만, 석가모니도 깨달음과 연관해서는 색계(色界) 사선정(四禪定)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초기(初期)에..
‘나’라는 말을 하게 되면서부터, 아기는 이기적(利己的)으로 된다고 합니다. 利己心는 어두움을 불러옵니다. 그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언어(言語)가 만드는 것이므로, 말을 쉬면 생각도 잦아듭니다. “태초에 말씀(Word)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이 하느님이니라 (요한복음 1:1)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끝에 깨닫는다(言下大悟)는 말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상대의 말을 잘 듣고 행간(行間)에 숨겨진 것을 찾아냅니다. 정말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학식과 이론)를 내려놓고 스승의 발 아래 조용히 앉아야 합니다. 혼자 오래만 앉아 있다고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주변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언어로 전달됩니다. 오죽하면 말을..
선도(仙道)에 대해 華道(세계선도연맹 네이버 카페)에 적힌 글을 읽다 보면, 깨달음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오히려 선도의 주제인 불로장생이나 소주천(小周天)보다도 더 자주 소개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선도와 연관된 도서들을 읽다 보면, 깨달음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단전(丹田)과 소주천(小周天), 태식(胎息)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서, 선도는 이(理)보다는 너무 기(氣)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도 하는데 말이다. 어찌 된 일인가? 간단히 말해, 선도의 깨달음은 당연사이기 때문이다. 선도의 공법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의수단전(意守丹田), 즉 뜻으로 단전을 지키는 것이라 하겠다. 의수단전을 인도식 표현으로 하면 복합 사마타(Samatha)라고 하겠다. 그 이유는 의수단전에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