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성명쌍수 (23)
谷神不死

싯다르타가 처자식을 버리고 유리걸식(流離乞食)의 삶을 택한 이유는, 늙고 병들고 죽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이었다.그가 그 문제들을 해결했는지는 따지지 말자.그 역시 늙고, 병들고, 죽었으니 말이다.그는 방향을 바꿔, 왜 우리가 고통받고 사는지, 고(苦)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찌하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지 비법(?)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불교의 중심 사성제, 즉 고집멸도(苦集滅道)이다.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인텔리들에게나 적용되는 것일 뿐, 나머지 인간적인 사람들에겐 이론에 그치고 마는 공염불이다.일반인들에겐 오히려 예수가 훨씬 친근하다.그는 직접 나서 불치병들을 고쳐 주었으며,"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간단하고 희망적인 말로 마무리를 지었기 때문이다.물론, 깨달음..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다. "하루를 살아도 천 년을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백 년을 의미 없이 하루처럼" 사는 삶도 있다. 미래를 위해 현생을 희생하며 사는 삶이 있고,현생의 돈과 권력에 몰두해 미래에 대해서 무지한 삶도 있다. 당신에겐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가? 선도(仙道)의 입장은 현생과 미래의 비중을 반반 두며 사는 것이다.그리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닦는데, 그것을 성명쌍수(性命双修)라고 한다. 우리에겐 미래(死後)도 중요하지만, 신앙만으로 현재의 삶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현실에 삶에도, 미래에도, 한발씩 걸치며 치우치지 않고 사는 삶,그것이 중도(中道)의 삶이 아닐까?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주고, 병아리가 안에서 쪼며, 서로 콤비네이션을 이루어야 일이 순조롭게 완성됨을 의미하는 말이다. 깨닫기 위해서도, 소주천(小周天)을 이루는 데도 마찬가지다. 스승과 제자가 힘을 합쳐야 수월하게 뜻을 이룬다. 스승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小周天을 신선대학(神仙大學) 입학허가서라고 한다. 그것이 신선이 되는 관문(關門)이기 때문이다. 소주천(小周天) 공부는 먼저 단전(丹田)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도 상당한 성의(誠意)가 필요하다. 성단(成丹)이 되려면 외단(外丹)과 내단(內丹)이 상합(相合)이 필요하다. 수탉이 있어야 병아리가 태어나듯이 내단술(內丹術) 만으론 부족하며, 외단공(外丹功)이 ..

꿈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모든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본능(本能)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자기를 이기는 힘,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독특한 가치다. 정치나 기업에 투신하는 사람이 국민과 노동자를 생각지 않고 자기 사리사욕만 추구한다면 그 런 사람은 모리배에 불과하다. 소주천(小周天)을 꿈꾸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기법(技法)보다는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내가 소주천을 원하는 이유에 대해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라. 그 대답이 명확하다면 그의 소주천 공기(工期)는 반으로 축소될 수 있을 것이다. 늘 자기를 살펴라. 타인의 시선에 좌지우지되지 말라. 대답은 모두 거기에 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에너지 장악이 부족하면 아직 편안함을 얻었다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명예는 있어도 땟거리가 부족한 것과 같다. 그리되면 비록 존재는 깨우쳤다 할지라도 에너지를 주재(主宰)할 수 없어 삶에 닥치는 불편함은 여전하다. 性(理)과 命(氣)은 서로를 도와 존재를 완성하게 되어있다. 아무리 밝게 리(理)의 세계를 깨우쳤다 할지라도 기(氣)가 받쳐주지 못하면 스스로 밝을 수 없으며, 에너지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理가 밝지 못하면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 깨달음을 얻었으면 氣의 운영을 공부하는 것이 순서이며, 축기(蓄氣)와 운기(運氣)가 되었다면 반드시 밝은 깨우침이 수반되어야 한다. 성(性)과 명(命)은 균형을 잃으면 안 된다. 어느 한쪽이 기울면 나머지 한쪽마저 흔들리기 때문이다...

견성(見性)은 단지 성품(性品)을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적용해 살지 못한다면, '빛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오후(悟後) 공부가 필요합니다. 불퇴진(不退轉)을 이룬 출가자(出家者)들이야 별문제가 없겠으나, 세간(世間)의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돈에 속고, 사랑에 속고, 자존심이란 놈에 깜박 속아 넘어가기 십상입니다. 깨달음에도 면역력이 필요합니다. 혹자는 화두(話頭)를 놓지 않는 것으로 방편(方便)을 삼고, 누구는 깨우침을 Remind 하는 것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고 하지만, 에너지가 부족하게 되면 닥쳐오는 역경계(逆境界)를 담담히 넘기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모토로 하는 사람들의 집단인 종교계에도 불협화음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결핍감의 부족분을 ..

명(命)은 얻지 못했어도 성(性)을 얻었다면(見性), 반은 얻은 것이다. 性은 얻지 못했어도 기(氣)를 통해 소주천(小周天)을 얻었다면, 역시 반을 얻은 것이다. 이미 반을 얻었다면 이젠 나머지를 마저 찾아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이미 반을 얻었다면, 나머지 반을 얻는 것이 무엇이 어려울까?! 둘이 하나가 된 것을 가리켜 성명쌍수(性命雙修)라 하고, 그것이 '이기일원(理氣一元)'이다.

의식(意識)이란 원래가 순수한 것이며, 그 순수성을 영(靈)으로 알아채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 공적영지(空寂靈知)라 한다. 의식은 순수하므로, 무엇과 만나더라도 그것과 하나가 되고, 곧 그것의 성질을 띄게 된다. 하지만 의식 하나만을 보면 그것처럼 순수한 것이 없다. 그런 차원에서 순수의식,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이 못된다. 의식은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구(不垢), 부정(不淨), 부증(不增), 불감(不減)하다. 선도(仙道) 수련이란 더 순수할 수 없는 의식과 무엇으로도 오염이 불가능한 에너지(氣)를 통합시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3요소는 정기신(精氣神), 즉 물질적 차원의 이 몸과 호흡으로 연결되는 에너지, 그리고 의식이다. 선도가 무르익은 사람은 시간이 흘..

'성명쌍수(性命双修)'란, 성(性)과 명(命)을 동시에 닦아간다는 선도(仙道) 용어이다. 性이란 깨달음의 자리, 즉 본성(本性)을 말하며, 命은 목숨과 사명(使命), 즉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 세계를 말한다. 불도(佛道)는 性을 중심으로 닦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허망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仙道는 다르다. 희노애락(喜怒哀樂), 먹고, 자고, 쉬고, 놀고, 즐기는 생생한 이 삶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性 공부를 중시하지 않는 이유는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命 공부를 진행하는 가운데 깨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담박 밝아 보여주는 것이 자성(自性)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命 공부(백일축기, 시월양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닦아 가야 하는 점수법(漸修法)이기 때문이..

스승의 가르침 가운데 뇌리에 남는 것은 '좌도(左道)에 빠지면 공부를 끝까지 할 수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런 말씀은 선도(仙道) 속에도 좌도(左道)와 우도(右道)가 공존한단 말씀이었고, 지나면서 보니, 우도보다는 오히려 좌도가 더 많이 눈에 띄었었다. 인간의 속성(俗性) 때문인가? 좌도는 힌두는 물론이거니와, 기독(基督)과 불교(佛敎) 그리고 그 외의 것 모두를 장악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다. 사람은 심심한 걸 거의 좋아하지 않는다. 우도는 거의 싱겁고 밋밋한 반면, 좌도는 다이나믹한 재미를 주기 때문이 아닐까? 좌도와 우도에 대해 늘 찜찜하였는데, 이제서라도 자명(自明)한 한마디를 할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좌도나 우도 역시 말과 생각에 속해 있음은 분명하나, 일단은 좌도와 우도의 구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