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6.1 주인 (The Master of life) (14)
谷神不死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두려워하고 있는 그것을 지켜보는 당체(當體)가 있다. 그것은 두려움을 모른다. 드러난 모든 것이 허깨비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도 그를 해칠 수는 없다. 그것이 만들고 허무는 주체(主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들고 허무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여여(如如)하게 존재로만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한다. 힌두는 그것을 브라마(Brahma)라고 하며, 그 神 앞에는 공물(貢物)조차 없다. 그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앞에는 숭배조차도 가당치 않다. 그렇다면 유대와 기독교에서 섬기는 "야훼(Yahweh)"에 대해선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그 유대의 신(神)은 질투하고, 노하기도 잘하고, 인간사에 개입하며, 다른 신단(神團)들과 전쟁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겐 이 몸과 마음이 꿈(妄想)에 불과하지만, 개안(開眼)을 이룬 사람에겐 이 몸도 마음도 세상도 모두 실재(實在)한다. 왜냐하면 그때부턴 주인으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밝아진 이후는 세상에 살든, 중심 에너지와 합일하든, 그 결정권이 모두 자기에게 있게 된다. 그것이 선도(仙道)이다. 성명쌍수(性命雙修)가 아니면 혼은 허공에 날아오르고, 몸은 흙이 되어 흩어지고 만다. 그것을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 한다. 하지만 性命雙修를 이룬 사람은 한 단계 승급하여, 지선(地仙)의 자리에 올라 자유(Moksha)를 누리게 된다. 仙道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이나 장생불사(長生不死)는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性命雙修란 밝음(깨달음)과 함께 득명(得命), 즉 生命에 대한 운영권을 자기가 갖는 것이다.

하루의 얼마를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하나요? 니체는 “하루의 2/3를 스스로를 위해 쓰지 못한다면, 이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답니다. 자신을 위해 스케줄을 짜고, 긍정적이고, 너그러우며, 자기를 믿고, 사랑하지 않으면 주인(主人)이 아닙니다. 자유를 누리고 살지 못하면 主人이 아니고, 자기가 누군지를 깨닫고 자기 에너지(氣)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主人이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지 못한다면 主人이 아닙니다. 늘 배려심을 가지고,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자유에까지 신경 써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主人입니다.

왜 그 자리를 주인공이라 하는가? 그 자리는 시공(時空)을 초월하며 三界(慾·色·無色)의 주인, 근경식(根境識)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성품(性品)이라고도 하며, 그 자리를 본 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그 자리는 변함이 없으며, 언제나 여기에 있기 때문에 원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자리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리는 경계(境界)와 따로 놀지 않고 경계(色聲香味觸法)가 일어날 때 함께 드러난다. 세상에 그 자리를 알아챈 것보다 더한 공덕(功德)은 없다. 그 자리는 세상사의 주관처이며, 그 자리를 만난 후부터는 境界를 따라 불편하게 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희귀(稀貴)하다. 늘 그 자리를 지키며(補任) 살아야 한다. 그 자리만이 실재(實在)이며, 그 자리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모두 자기를 위해 하는 짓이고(가족을 위해 한다는 말을 믿지 말라), 권세(權勢)를 얻으려 애쓰는 것도 자신을 위한 일이며(共益을 위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명예를 얻거나, 자기 씨를 퍼트리려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그런데... 자신이 사라지거나 자기가 누군지 모르면 그딴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으며, 돈, 권력, 명예, 그리고 그 외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에너지(氣)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에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그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돈, 권력, 명예를 내 것으로 누리고 살 텐데 말이다. '개벽(開闢)'이란 다른 게 아니라 훤하게 열린다는 뜻이다. 인간들의 관심이 엉뚱한 곳을 향하고만 있으니, 부득이 자연의 섭리는 개벽이란 것을 이용하여 인간들을 눈뜨..
몸이 자동차라면 마음은 운전사이다. 몸이 없이 마음은 없으며, 마음 없이 몸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뒷자리에 몸과 마음의 주인이 앉아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자동차도 아니고, 운전사도 아니다. 주인이 목적지를 바꾸면 운전사는 핸들을 틀어야 한다. 모든 책임은 주인에게 있다.

깨달음이란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나를 한계 짓고 있는 벽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애가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자유로움을 얻는 것입니다.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빈틈없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몇천 년 묵은 체기가 쑥 내려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主人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밝아진(見性) 사람은 생각 없이 사나요? 아닙니다. 그는 생각의 주인입니다. 생각이 필요할 때는 생각을 불러내고, 필요 없을 때는 "쉬어라" 하고 지시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의 바탕 자리(本來面目)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없이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일토록 그의 친구는 에너지(氣)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의식(意識)과 에너지(氣)의 계합(契合)이며, 仙道 용어로는 태식(胎息)이라 하는 재밌는 놀이입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의 큰 잘못은 집 안에 들어가기 위해 대문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집 안에 있는 주인에게 용건이 있다면 대문 밖에서 초인종을 눌러야 합니다. 대문 안에서 아무리 문을 두드린들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문이 열렸다고 문밖으로 나가서는 안됩니다. 몇천 리를 찾아 헤맨다 해도 거기선 주인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아무리 많이 만난다 해도 결코 주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선지식(善知識)이 제자 귀를 잡아당기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었던 이유를 이제는 좀 알겠습니까?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알면 즉각 허깨비 놀음에서 벗어날 것이며, 그 놀음에서 벗어남이 곧 깨달음이다. (知幻卽離 離幻卽覺)"라 하였습니다.
道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것을 찾겠다고 문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이 몸과 마음이 바로 道의 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몸과 마음을 통해야만 道를 찾을 수 있습니다. 상상력이 만든 허황한 것들을 믿지 마십시오. 이 몸과 마음이 아니고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몸과 마음을 살피노라면 정말 만나야 할 주인공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주체가 되는 그것을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에 힘입어 작용하는지를 알아채면 그대로 깨달음(如來), 성령(聖靈)을 만난 것입니다. Halleluj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