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1. 삶, 꿈이 아닌 현실 문제 (Life, the reality) (18)
谷神不死
자유는 이해에서 온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윤회에서 벗어나거나, 사후의 지옥을 면한다거나, 초능력이나 재물, 권세, 명예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깨달음의 목적은 ‘나’와 세상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한발 더 나아가 신체적 불편이나 정신적 위협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서 자유롭고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자신의 번뇌(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妄念)를 해결하고, 이차적으로는 타인을 배려하며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나은 삶이 어디 있겠는가? 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 몸과 이 마음이 내가 아니며, 나라는 것을 포함한 이웃 모두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상은 인연을 따라 스스로 굴러가므로 있는 그대로 완벽하며 ..

대전의 J 목사는 TV 프로에 나와 말하길, 꿈을 이루고, 성공을 거두면 1등, 꿈은 이루고, 성공을 못 하면 2등, 꿈은 못 이루고, 성공을 하면 3등, 꿈도 못 이루고, 성공도 못 하면 4등이라고 했다. 꿈에 대해서는 각자 다를 것이지만, 여기서 성공이란 돈을 말함인데, 아마도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의도의 J 목사는 “교회를 일 년 다니고도 가난하다면,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모두들 “아멘”이라고 소리 질렀다. '성공(成功)'의 사전적 의미는 “목적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돈(money)이란 말인가? 주류를 이루는 기독교에선 아마도 그런 것 같다. * * * * * Q: 그런데... 꿈을 이루고도, 큰돈을 갖고도, 썩 만족하는 사람은 ..

깨달음은 낭만(浪漫)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현실(現實)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판타지(fantasy)가 아닙니다. 깨우침에서 초월적인 것, 환상적인 것을 찾지 마십시오. 깨달음은 시끌벅적한 난장(亂場)입니다. 깨달음은 꿈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서적이지도 않고, 이상적이지도 않습니다. 깨달음은 피가 철철 흐르는 전쟁 마당입니다. 깨달음은 추억이 아니고, 미래도 아니며, 현실 자체입니다. 죽은 이야기, 곰팡이 냄새나는 베껴온 이야기는 그만 하세요. 한 치만 벗어나도 딴 동네서 놀게 됩니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 살아 펄펄 뛰는 "이것"입니다.

독재정권하에서 독재자에 동조하면 남들보다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민주화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반기지 않습니다. 누리던 것들의 일부를 내어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 친일파, 친미파입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소주천(小周天)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깨달음과 소주천이 필요하다고 하면 일단 그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 몰라도 잘 먹고 잘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데, 쓸데없는 것이 부가(附加)되면 기존의 생활 일부가 달라질 수 있고 그것에 시간을 할애하게 되면 기존의 즐기던 것 일부를 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깨달음 공부나 소주천을 위해 특별히 희생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이왕 하던 운동을 좀 나이에 맞춰서 체계(體系)를 잡아서 하고(운동 싫어..

원망도 하지 말고, 후회도 하지 말라. 지금의 당신이 당신의 선택 중 최상이다. 사람은 항상 더 좋은 것을 선택하도록 구조되어있다. 석가모니의 첫 출가 동기는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생노병사(生老病死), 즉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을 수 없을까였다. 사색의 사색을 거듭한 결과, 의식이 한 단계 승화하여 고통만 사라지면 좋겠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성제(四聖諦), 그의 가르침의 핵(核)이며, 그 뜻은 '고집멸도(苦集滅道)', 즉 고통의 원인은 집착(執着)이며, 그것을 다스리려면 도(道)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에서 여덟 가지 바르게 닦는 법, 즉 팔정도(八正道)가 출현한다. 그리고 최상(最上), 마지막의 과제(깨달음)가 무여열반(無餘涅槃), 즉 다시는 윤회(輪廻)하지 않는 ..

내일은 오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입니다. 어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알지 못할 곳으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행복해야 합니다. 오늘 행복하지 못하면 영영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일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하는데 후일을 기약하지 마십시오. 그날은 영영 오지 않습니다. 오늘 공부하십시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오늘뿐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부터 설득하십시오. 자기가 누군지부터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나면, 비로소 자기를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타인을 설득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기다리십시오. 그가 선택할 때까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먼저 자기 자신부터 설득하십시오. 자기 설득이 없이 남을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꿀 것은 오직 당신의 망상(妄想)과 고집뿐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그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타인을 설득하는 길입니다. 세상에 그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지만 말입니다.

"낙천적(樂天的)이지는 못하더라도 낙관적(樂觀的)으로 살자"는 말이 있다. 낙천적과 낙관적은 어떻게 다른가? 낙천적인 것은 선천적(先天的)이고 낙관적인 것은 후천적(後天的)이다. 낙천적인 사람은 낙천적으로 태어난다. 유전자나 기후 조건, 그리고 사회 구조가 낙천적으로 되도록 구조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변하는 기후 속에서 늘 외세의 압박을 받고 눈치 보며 살아왔으므로, 사회 구조 형성 자체가 낙천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스스로 낙관적으로 될 수밖에는 없다. 아프리카 등 열대 지방 사람 중 낙천적인 사람이 많다. 그들은 유전자가 이미 그리되어 있으므로 생각하고 노력할 필요가 거의 없이 그대로 낙천적이다. 낙관(樂觀)이란, "사물을 좋은 쪽으로 밝고 희망 있게 보는 것"이다. 그것은 저절로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 때 화막(screen)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영상을 따라 울고 웃을 뿐입니다. 영사기가 멈추면 비로소 스크린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잠시 전에 비가 오고 화산도 폭팔했지만, 스크린에는 흠집 하나 없습니다. 순수의식을 체험하고 나면 그것이 빈 스크린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싱겁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만들고 세상을 만드는 본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빛을 비추면 화면에 온갖 것들이 나타나듯이 말입니다. 우리들은 매일 그 소중한 것을 지나치고 삽니다. 의식하는 놈은 의식(意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심사가 온통 돈과 편안함에만 있으면 은연 중 자기가 서서히 지워져가는 우울함이 있습니다. 온갖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는 일상사 가운데서 자기가 자성(自性)에 얼마나..

예수가 제자들에게 널리 전하라고 한 good news(福音)는, "그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고(요한 11 : 25), 혹 죽는다면 천국에 살 것이다"였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자기(眞我)가 누군지를 깨우치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밝은 미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너지를 얻으면 스스로 자기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저는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확인하라고만 합니다. 물론 확인하고 안하고는 당신의 자유이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