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68)
谷神不死
밝아지면 아공법공(我空法空)의 경지에서 저절로 팔정도(八正道), 육바라밀(六波羅蜜)이 이어지게 되어 있다.六波羅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며, 강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중언부언하면 장삿속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我空法空의 깨우침이 정견(正見 )이며,바른 견해를 얻으면 八正道는 물론이거니와, 六波羅蜜 역시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 깨달음을 얻으면 마음에서 우러나 저절로 보시(布施)가 나오고,본래면목(本來面目)에 기초한 지계(持戒), 인욕(忍辱)이 이루어질 때,정진(精進), 선정(禪定)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으며, 그것이 그대로 지혜(智慧)로 연결된다.육조혜능은 오직 견성(見性)만을 말할 뿐, 선정 해탈은 말하지 않았다.오직 깨우침에 힘씀이 우리의 삶이며,그것을 얻으면 그것을 유지시킬 에너지와 계합(..
누구나 알만한 나의 스승 중 한 분은 낙상(落傷)으로 고관절을 상해 오래 자리보전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평소 보약(補藥)은 자주 드셨으나, 많은 시간을 앉아만 계신 것이 주원인이었다. 나이가 들면 하체(下體)의 힘이 줄고 평형감각(平衡感覺)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리되면 뇌에 이상이 없어도 중심 잡기가 어려워진다.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은 당연히 운동이다. 운동 중에 제일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부작용 없고 멋스러운 태극권(太極拳)이 압권이다. 태극권은 자세를 낮추고(騎馬勢) 몸의 중심을 좌우로 이동시키는 것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자세를 낮추니 하체에 힘이 붙게 마련이고, 몸의 중심을 좌우로 옮기니 평형감각이 줄어들지 않게 한다. 매일 꾸준히 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으나, 기운(氣運)의 운용을 통해 신선(神仙..
요즘 정가(政家)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똥볼'이란 말이 있다. 그 말은 한국어와 영어의 합성어로서 한마디로 'Miskick'이다. 정작 보내야 할 곳, 즉 골대나 자기편에게 공을 주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공을 차내는 것을 '똥볼 찬다'고 한다. 원인은 물론 자질 부족, 연습 부족 핵심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그 말을 깨달음 수행(修行)에 적용해 보았다. 신심명(信心銘)의 첫 구절, '지도무난(至道無難)'은 "도(道)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다"는 말이고, 심지어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는 말이 있음에도, 히말라야를 오르고, 산속에 들어가 평생을 바치고도, '아직'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한마디로 똥볼을 차고 있기 때문이다. 스승의 말을 주의 깊게 듣거나, 전등록(傳燈錄) 몇 구..
예수가 죄가 있었던가요? 그가 할 일을 다 하고 저세상으로 갔던가요? 왜 그는 요절(夭折)할 수밖에 없었던가요?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 등등 그의 신랄한 독설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라"라고 늘 말했습니다. 비록 옳다 할지라도 남이 싫어하는 말은 자제해야 합니다. 이죽대거나 비판하는 것으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는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다. (마태 7:2)"라고 말했습니다. 남이 나를 욕해도 그냥 "그렇구나!"하고 묵묵히 가도록 합시다. "그럴 만하니까 그랬겠지"라고 생각합시다. 눈에 거슬려도 내 일이 아니면 참견하지 말도록 합시다. 오직 그 자리(眞理)만을 ..
자기가 자기를 누군지 모르고 산다면 그것을 살아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일체(一切)가 허망(虛妄)하다느니,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고(如夢幻泡影) 하는 것이다. 아직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깨달음 길에 나서며, 대부분은 벌어지는 일에 속아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살고 있다. 그들은 자성(自性)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다. 그들은 소유와 권력, 그리고 Sex만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 알고 있다. 조금만 생각을 조율해 본다면 외로움, 우울함,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말이다. 모든 괴로움(苦)은 자기 정체성의 부재로부터 온다. 하루 10분 만이라도 외부로 향하는 마음을 내부로 돌려보자. 보고 들리는 것들과 느낌만을 따라가기보다 그리하는 본체(本體)에 에너지를 써보자. 숨을 고요히 지켜..
선도인(仙道人)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선도인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세속의 일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세상일이란 것이 한쪽만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불선(儒佛仙)의 범주로 구별할 때, 예수교는 선도에 속한다. 특별히 주님을 상정하지는 않지만, 기(氣)를 인정한다는 점, 그리고 건강과 영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불교(佛敎)와는 선불합종(仙佛合宗)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친밀하다. 선도인의 은둔은 자연스럽다. 무리한 출가를 하는 등 유별나게 살지 않고, 허락하는 한 사회의 규범을 따르며 유인(孺人)처럼 산다. 선도의 추구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기운을 인조이(enjoy)하면서 산다. 아마도 그것은 신앙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로망일 것..
아무하고나 공유(共有)를 운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사람하고만 가능한 일입니다. 共有란 공동소유의 준말입니다. 공유란, 말 그대로 어떤 바람직한 것을 여럿이 함께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누어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한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를 통째로 돌려쓰거나 똑같은 형태로 복제하여 소유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공유를 위해선 Cycle과 Code가 맞아야 합니다. 생각과 의지(意志)가 일치하지 못하면, 공유는 깨집니다. 그리되는 순간, 공유의 가치는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분열되면 될수록, 공유의 효력은 반감됩니다. 형제보다 더한 끈끈함, 부자(父子) 관계처럼 자기를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지 못하면 공유는 무의미합니다. 공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때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과 있었다가, 대상이 사라지면 어디론가 숨어 버립니다. 그것을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또한 수련에 의해 깨끗하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체적으로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과 하나 되면 세상 부러운 것이 없이 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도인(道人)이라 부릅니다.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렵고도 쉽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그것과 하나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몸과 마음이 "난" 줄 알고 살았었는데, 그것들은 단지 "나"의 소유, 내가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깨달음입니다. 인생은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고통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세상엔 온통 기쁘고, 감사할 일뿐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 깨달음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모두 알아서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으지도 아니하되, 모두 아버지가 기르시나니 너희가 그것들보다 貴하지 아니하냐? (마태 6:26) 깨달음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몸의 움직임에 마음을 모으는 주시자(注視者)가 되어야 한다. 걷거나 외단공(外丹功)을 진행하면서, 나의 몸 움직임을 관찰해보자. 알아차려 보자. 두 번째는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한다. 현재에 머무르는 데 매우 유효하다. 세 번째는 마음의 흐름을 관찰한다. 들떴는지, 고요한지, 무슨 생각들이 이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면 자아의 현주소를 알게 된다. 네 번째는 대상에 대한 반응을 관찰한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대상과 나와의 상관관계에 마음을 모은다. 나의 경향을 알고 안정된 나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다섯째, 안다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관찰자로 관찰자를 관찰한다. 이제 자성(自我), 주인공의 정체를 알게 될 날이 머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