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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깨달음을 얻으면, 흔들리지 않는 견해(正見)가 생깁니다. 사고작용이 정리(正思)되므로, 이치에 맞춰 우왕좌왕하지 않는, 누가 들어도 끄덕일만한 말(正語)을 하게 되고, 행동도 그에 따라(正業) 하게 됩니다. 자기를 늘 살펴보십시오. 만약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하다면, 공부가 좀 더 필요합니다. 단전(丹田)이 열리면 생각이 우왕좌왕하지 않습니다. 에너지(氣)의 막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에 여유가 생기고 당당해집니다. 에너지(氣)가 여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라집니다. 신(神)과 기(氣)가 계합(契合)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것이 열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개안(開眼)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지성(知性)입니다. 그리되면 세상사에 끄달리지 않고 살게 됩니다. 고요함에 머무르는 공부를 아무리 오래 해도 소용없습니다. 허깨비를 허깨비로 아는 눈이 없으면, 멀쩡히 눈 뜨고 계속해서 코를 베이게 됩니다. 맨날 같은 단어나 되뇌이면서 벽을 보고 앉아 있거나, 숨만 바라보는 것으로는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결정적 뒤집기가 필요합니다. 시끄러움 속, 혼란 속에 부대끼고 살면서, 다각적으로 닦아야 제대로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 눈을 제3의 눈, 혜안(慧眼), 도안(道眼), 신안(神眼)이라 합니다. 눈이 열려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않게 됩니다.
깨달음이 올 때 대부분의 사람은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막혔던 氣가 열리기 때문이다. 강한 기감(氣感)을 느끼기도 하고, 氣가 전신으로 흐르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 깨우침이 몸속 기운을 깨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치(理致)로 알음알이만을 키운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깨우침은 머리에서 그쳤기 때문이다. 초견(初見)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어두워지는 이유는 에너지와 연결을 못 했기 때문이다. 깨우침과 氣(小周天)를 동시에 얻은 사람은 그다음부터의 공부가 점점 더 재밌고, 풍요로워진다. 그런 사람은 나머지(補任) 공부를 수월하게 하게 된다. 氣의 작용이 그 자리가 흐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도(仙道)에서 "본성(本性)과 에너지를 동시에 닦으라..
사물을 인식(認識)할 때는 인식자와 인식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인식자가 있으므로 인식 대상이 있고, 인식 대상이 있으므로 인식자가 있는... 서로에게 의지하여 존재합니다. 그런 경우 무엇이 주재자(主宰者)일까요? 과연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는 것은 존재할까요? 그래서 남방불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나는 없다"는 무아론(無我論)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없다고 해도 "나"란 것은 있지 않습니까? 이론상으론 없고, 모양은 분명치 않을지 몰라도, 분명히 존재하지 않나요? "나는 없다"고 주장하는 그놈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그것은 이미 몸과 마음을 벗어나 있으나, 차원이 다르게 존재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이름을 지은 것이 "텅 비어 있기는 하지만 묘하게 있다"는 의미의 진공묘유(眞空妙有), 혹은 "텅..
問: '깨달으면 운(運)이 바뀐다'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았기에 운이 바뀌는 것입니까? 운이 바뀌었기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答: 그 질문은 인과(因果)만 생각하고, 연기(緣起)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과란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난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저런 결과가 생겨난 것을 말하는 One way입니다. 하지만 연기란 쌍방통행입니다. A가 있으므로 B가 있고, B가 있으므로 A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연기입니다. 즉, 깨달음은 도통운(道通運)이 없는 사람에게는 일어나기 어렵지만, 반면에 깨달음 인연이 왔다는 것은 도통운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도통(道通) 공부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도통을 해버리면 그것이 바로 도통운이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하기 어려운 성가시고 힘든 일을 만나면 마음속으로 고민만 하지 말고,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미래에 지장을 줄 만큼 중대한 일인가? 피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구별할 줄 압니다. 그리고 '아니다' 하는 일에는 손대지 않습니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인생이 망가지지는 않습니다. 무엇에나 용감(勇敢)해져야 합니다. 처음엔 망설여지지만. 무엇이든 몇 번만 반복되면 내 스타일이 됩니다. 하지만... 피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성(自性)의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소주천(小周天)이 무언지 알게 되고, 소주천을 먼저 이루면 저절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드러납니다...
수행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자기 정체성 확인하기, 다른 하나는 에너지(氣) 활성화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간이 나면 즐기는 취미가 아니며, 거의 의무에 가깝다. 인간이 자기본성(自性)을 모른다면, 아무리 많은 재물과 권세를 누린다 해도 짐승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에너지 수련 역시 특별하지는 않다. 그것은 자기 밥을 자기가 찾아 먹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마음 공부를 한답시고 몸을 소홀히(학대) 하는 사람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만하며, 그런 사람은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모른다. 시타르타도 처음 여러 해 동안 그런 어리석음(愚)을 범했는데, 몸 관리를 시작하고 나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 선도(仙道)는 몸 공부로 마음 공부를 하고 마음 공부로 몸 공부를 한다. 에너지(氣)를 중시하며, 통기, 축기, 운기로 공부를 진행하는데, 일견 몸 공부인 것 같아도 사실은 마음 공부로 직행한다. 몸과 마음은 하나다. 고로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 그것만 알아도 깨달음은 바로 문 앞이다.
사후(死後)에도 삶이 있을까? 천당과 지옥이 있을까? 윤회(輪廻)라는 건 과연 존재할까? 그런 생각들을 망상(妄想)이라 한다. 단지 추정(推定)일 뿐 확인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事實)만을 생각하고 믿는 것이 현명함이다. 연구심 깊은 일부 의사들은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 왜 죽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뇌(腦)는 그 사용 범위가 끝이 없으며, 세포들은 쉼 없이 재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 가진 "영원(永遠)을 사모하는 마음"을 착각이라고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종(種)을 막론하고, 생명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거부한다. 우리는 생명 연장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으며,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턴가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고 있으며, 오래지 않아 누구나 자..
무엇보다 깨달음이 먼저다. 먼저 자기가 누군지부터 깨우쳐야 한다.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아는 것보다 깨우침이 우선이다. 깨어난 사람은 하느님과 친구가 된다. 그에게는 어느 교파가 바르고, 어느 교파가 사이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교회들이 사탄(일루미나티)의 하부조직이든지 말든지, 그에겐 아무 상관이 없다. 그에게는 인도 명상을 해야 하는지, 간화선을 해야 하는지, 위빠사나가 좋은지,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 깨어나면(頓悟) 모든 것이 해결 나기 때문이다. 마치 배부른 사람에게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가 관심이 없는 것처럼... 깨어난 자는 이미 그 자리에 있으며, 그 자리는 극락이며, 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