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72)
谷神不死
문: 견처(見處)를 얻으면 분노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답: 아닙니다. 처음엔 전보다 더 화(anger)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습니다. 담배 냄새가 더 참을 수 없게 되듯이 말입니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불길이 번져 잡을 수 없게 되듯,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에고가 51%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회하는 순간 다시 본성 자리로 51% 회복합니다. 의기소침할 필요 없습니다. 혹시 상대가 있었다면 그에게 사과하고 스스로 회개함으로써 본성 자리가 점점 더 확고해질 수 있습니다. 정권(政權)이 바뀌었다 하여 바로 모든 적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깨우침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에 1%씩만 밝아지겠다고 결심하십시오. 1~2년만 지나면 안정적으로 본성(本性)에 주도권이 돌아갑니다. 그..
상위인지(Meta-cognition)로 바라본 새로운 도덕관(morality)입니다. 유림(儒林)의 오덕(五德)과는 격차가 있습니다. 1. 사랑(仁)은 흠잡기 어려운 최고선(善)입니다. 상황에 따라 상대와의 상의(相議)하에 내가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해주고, 그가 원치 않는 것은 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요한 13:34) 2. 의(義)와 불의(不義)는 정하기 매우 난감합니다.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입니다. 3. 예(禮)는 시대가 정한 서로 간의 약속입니다. 경우에 따라 베풀어준 禮가 결례(缺禮)가 될 수도 있습니다. 4. 알음알이(知) 역시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5. 믿음(信)은 바람직하지만 ..
우리는 누구나 어수선한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세상을 떠나 본향(本鄕)으로 이동하는 신비한 문(gate)을 가지고 있다. 그 자리는 에너지(氣)를 받아들이고 조절하는 자리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으며, 백두산 신선(神仙)들은 그 자리를 '단전(丹田)'이라고 하였다. 그 자리는 전신적 에너지 루트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하나(下丹田)가 열리면 세 갈래의 丹田이 모두 열리게 되어 있어서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라고 가르친다. "일규(一竅)가 열리면 백규(百竅)가 통한다"는 말은 丹田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仙道는 性 공부(깨달음)보다는 命 공부(丹田)에 더 치중하는데, 그 이유는 丹田이 열리면 애쓸 필요 없이 자동으로 본래의 자리인 텅 비고 고요한 자리(定)에 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깨..
세상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고, 모든 길흉화복(吉凶禍福)이 그로부터 나온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살아보니 하느님이 만물을 만드셨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인간사에는 관여치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어도 마음의 평화만 얻게 되었을 뿐, 세상살이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얻은 道를 실질적으로 세상사에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일이(一理) 있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느님이 인간사에 관심이 없다거나, 道를 얻은 것으로 세상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하느님은 있어 무엇할 것이며, 道란 것이 호사가(好事家)들의 심심풀이 놀이보다 더 나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 혹시 나에게 잘못은 없는가를 살피고 그럴만한 일이 있다면 뉘..
깨달음을 단지 perception(自覺)으로만 설명하려는 선생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perception이 있으면 당연히 projection(투사, 투영)도 있는 법입니다. 그것을 붓다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緣起)'로 설명했습니다. 깨달음은 득명(得命)을 수반해야 하며, 그것이 든든해져야 말뿐인 보시(布施)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차려 줄 수 있어야 진짜 보시입니다. 배고픔을 헛것이라고 세뇌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더 큰 보시는 평화와 안정입니다. 보시를 땅끝까지 널리 퍼트리는 것(projection)이 깨달은 자의 사명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대승(大乘)이라 합니다.
"간음(姦淫)하지 말라. 여자를 보고 음심(淫心)을 품은 자는 마음에 이미 姦淫하였느니라." 건강한 男子라면 女人을 보면 당연히 淫心을 품게 되어 있다. 그것은 자연현상이고, 조물주가 그리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예수는 도저히 불가능한 요구를 한 것인가? 모든 남자가 女人을 보고도 淫心이 안 생긴다면 세상은 어찌 될까? 아마도 인류는 씨가 마르고 말 것이다. 누구는 말한다. "그 말은 자기 婦人에게만 淫心을 품으란 말"이라고...ㅋㅋㅋ 얼토당토않다. 그렇다면 아직 혼전(婚前)의 男子는 어찌해야 할까? 그리고 자기 부인에게만 淫心을 품는 男子가 몇이나 있을까? 위선을 버려라. 오히려 外間 여자에게 더 淫心이 생기는 것 아닌가? 聖人의 말씀은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 말은 淫心이 생길 때 그것이 어디서 오는..
선도(仙道)의 기초인 연정화기(鍊精化氣)를 수련하다 보면, 눈을 감든 뜨든 온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에너지(氣)와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하나"를 알아채게 된다. 그 범위는 알아챔의 크기만큼이어서(識無邊處) 가늠키 어려운데, 작다면 깨알 크기에서 확장되면 우주만큼(空無邊處) 펼쳐진다. 그 안에 세상 모두가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그것을 알아채고 있는 "自覺(Awareness)"은 그 안과 밖에 모두 실재한다. 그것이야말로 선사(禪師)들이 말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와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실감이다.
몸과 마음은 공존(共存) 관계다. 몸이 이완되면 마음도 이완되게 되어 있고, 마음이 긴장할 일이 생기면 몸도 경직된다. 깨달음(행복)을 위하여 이완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모든 일은 이완(relaxation)으로 통하니 말이다. 그것을 위해 지치도록 운동(일)을 하거나, 따뜻한 목욕, 그리고 요가 등으로 스트레칭을 하는 것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가성비가 너무 낮아서 잠시만 게을리하면 바로 환원되고 만다. 단언컨대, 운기(運氣)보다 더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것은 없다. 이완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관심이 있다면 당장 氣 공부에 뛰어들 것이다. 우선 氣를 알아야 하며(得氣), 氣에 시동을 걸 수 있어야 하니 말이다. 약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運도 따라야 한다. 좋은 스승..
진실(眞實)은 허(虛) 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의 이해는 어렵다. 생각의 밖이기 때문이다. 선도(仙道)는 친절하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것(精)부터 공부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기(氣)를 얻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연정화기(鍊精化氣)'라고 한다. 氣를 알게 되면 우선 건강해지고 살만해진다. 그러므로 대부분이 거기서 공부를 그친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다. 소수의 사람은 氣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로 다시 궁금증에 빠진다. 그때 시작하는 공부가 氣 공부, 즉 '연기화신(鍊氣化神)'이다. 그 공부로 마음을 파악하게 되지만, 마음이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 너머에 있을 진짜 주인의 정체가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다시 공부가 이어지는데, 그 공부가 '연신환허(鍊神還虛)', 즉 虛와의 계합(..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생명 유지는 자연현상이다. 그것은 식물, 동물, 그 외의 모든 존재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너지가 빛, 열, 소리, 전자기, 운동, 혹은 어떠한 형태로 변해도 에너지 총합은 언제나 일정하다)과 질량 보존의 법칙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생명 유지는 집착(생각)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며, 누구도 손댈 수 없다. 식물과 동물의 생명력뿐만 아니라, 미물(微物) 속에서도 생명 유지의 염원이 꿈틀대고 있는 것을 보라. 싯다르타는 고통의 완전한 소멸을 꿈꾸던 중 존재가 있는 한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착오에 빠진 것 같다. 그는 초기에, "모든 것은 변한다(無常)", "일체가 고통(苦)이다", "나라는 것은 없다(無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