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72)
谷神不死
仙道를 신체 건강하고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가르침이라고 하면, 왜 사후(死後)의 이야기는 빼고 이야기하느냐고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성(自性)을 찾아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니 그렇게 믿고 살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본 적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죽음을 그리도 싫어하면서도, 지금 이 보물 같은 삶을 무시하는 말들을 너무도 많이 합니다. 그리 말하면 자기가 조금 높아진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지금 숨 쉬고 생각하는 이놈을 직접 보면 내가 누군지는 바로 알아챌 터인데, 왜 알 수 없는 곳, 누군가로부터 주입된 검증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마치 사실처럼 믿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른 견해를 가진 선도인(仙道人)은 死後의 이야기는 가급적 피합니다. 밤을 새워 이야기해 본들,..
건강 문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원인과 해결책을 생각합니다. 깨달았다는 어떤 이가 말했다는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최선이다"라는 말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것만이 최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는지 그 원인을 먼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해결책이 없다는 결론이 났을 때만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내합니다. 더는 생각을 진행하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발견되었을 때는 힘써 해결에 돌입하고, 혹시 이미 시기를 놓쳤다고 판단될 때는 반성하고, 다음번에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 둡니다. 그것이 바른 이성(理性)의 소유자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생활이 좀 나아졌습니까?" 깨우침을 가르치는 어떤 분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깨달음이 여유 있는 생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무상(無常)을 알면 꼭 고통 속(皆苦)에 없이 살아야 하나요? 좀 행복해지면 왜 안 되나요? 도인(道人)은 밥 빌어먹고, 누더기에 축축한 동굴 속에 살아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습니다. 유마힐은 부자로 살았는데, 깨달은 이가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 왜 안 될까? 정원 넓은 아름다운 집에 살면 왜 안 되나요? 먹고살기 바빠서 道 닦기 어렵다는 말은 이제 사라질 때가 되었습니다. 100여 년 전, "내 제자가 되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선배 道人의 예언이 이제 이루어질 때가 되지 않..
선도(仙道)는 기운(energy)을 알아채고 조절(control)하는 수련법입니다. 기운이 너무 성(盛)하면 가라앉혀야 하고, 너무 약(弱)하면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스스로 알아서 통제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혹자는 일체 통제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공부(수련)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공부도 하지 말고, 통제도 하지 말라"라는 소리가 일부 사람들에게는 호응을 얻을지 몰라도 정말로 통제를 모두 풀어버리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 노는 것, 일하는 것, 가리지 않고 모두가 어느 정도의 통제는 필요합니다. 통제가 필요 없다면 법(法)과 정부는 왜 필요하며, 학교와 경찰력은 무엇을 위해 필요하겠습니까? 바른 수행자라면 중도(中道)..
나는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할 수 없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의식(意識)이 가는 곳에 나는 있다. 첫사랑을 생각한다면, 그 기억 속에 나는 있다. 독서하고 있거나, 영화를 보고 있다면, 그 속에 있다. IMF를 생각한다면 그곳에, 통일 한국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곳에 나는 있다. 나는 움직인다. 나를 두는 곳에 나는 있다. 그렇다면 나를 어디에 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절대자리 단전(丹田)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곳은 생명 자리, 그리고 에너지의 중심 자리다. 그곳이야말로 여래(如來), 성령님이 계시는 자리요, 나를 그곳으로 있게 하는 그것을 가리켜 공(空) 또는 허(虛)라고 한다.
첫째, 이 몸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는 것, 이 몸이 지구에서의 삶에 바탕이 된다는 것을 잊고 산다. 혹시라도 관심을 가지는 시간은 아플 때뿐이며, 보통 때는 대충 소홀히 대한다. 둘째, 이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에너지(氣)를 모르고 산다. 氣를 통하고 유지하는 일에 대해선 거의 노력하지 않는다. 셋째, 마음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마음에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고 받아 넣어 놓고 그것들을 지키느라 애쓴다. 심지어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 선도(仙道)는 몸과 마음, 그리고 에너지(氣)를 '세 가지 보물(三寶)'이라 하여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의 관리를 위해 정성을 바친다.
우리는 그 자리(本來面目)가 생긴 적도 없고 사라지지도 않는다(不生不滅)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우리는 그 자리가 생길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고,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리가 영원할 것이라고 추론(推論)할 수는 있다. 약간만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는 흠이 생기지도, 때가 묻지도 않고(不垢不淨),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는다(不增不減)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변치 않는 것은 오직 그 자리 밖에는 없다. 이 몸과 이 마음이 내가 아니라 그 자리가 진짜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 그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호흡 수련이나 태극권, 기공을 하는 사람 중에 불룩 나온 배를 단전(丹田)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농담이라면 모를까, 그것은 명백히 틀린 생각입니다. 丹田은 크기가 없습니다. 그것은 부피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주보다 커질 수도 있지만 먼지보다 작아질 수 있습니다. 배가 나오는 것은 쓰고 남은 에너지의 축적입니다. 한마디로 식사량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수행을 하면 에너지 효율이 높아집니다. 스트레스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복부비만(내장비만)은 건강에도 해롭습니다. 정신을 흐려지게 하고 신진대사 장애를 가져옵니다. 식탐(食貪)을 줄이고, 꾸준히 운동해야 합니다. 소식( 一日一食)을 하고는 있지만, 필자 역시 복부비만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50대 이상이 되면 에너지 소모율이 낮아집니다. ..
지금 한국의 깨달음 문화는 세계화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가 돈과 힘없는 사람의 이야기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한국의 문화는 세계인의 눈에 띄지 않았었습니다. 사실상 세계의 정신문화는 기독교 위주였고,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돈과 무력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21세기 4차 산업 정보화가 주도하면서 문화의 다변화 시대가 되었습니다. 힘은 없지만, 조용히 힌두와 불교문화가 세계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이슬람 문화도 서서히 힘을 뻗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동방의 빛 KOREA"입니다. 전자제품과 건설, 자동차, 선박 그리고 반도체 수출로 시작한 국력이 문화로 승화되면서 체육 예술, 특히 영상과 음악 쪽에서는 이미 괄목할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
깨달았다면 나와 세상과의 상관관계를 알아야 하며, 내 마음과 몸이 어떤 연관을 짓고 있는지도 이해해야 한다. 내가 편해졌으니 세상은 어찌 되든 모르겠다 한다면 2% 부족한 소승(小乘)이 되는 것이고... 마음이 편해졌으니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 부정맥이 있든, 소화불량이 되든, 비만, 고혈압, 당뇨가 있든, 어깨 결림, 요통에 치질이 있고, 감기를 달고 살아도,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일체가 꿈이니, 내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하든 꿈속 일일 뿐이다"라고 한다면..., 정말 깨달은 것이 맞는지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요새는 개나 소나 모두가 깨달았다고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