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76)
谷神不死
하루 5분 종아리를 주무르면 면역력이 5배 오르고, 萬病이 다스려진다는 보고가 있다.종아리는 제2의 심장이라 하며 모든 臟器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고...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아리를 주무르는 것만 가지고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다고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게다가 그것은 남의 힘을 빌려야 한다. 자기가 하면 별로 시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면역력을 올리는 종합적인 방법은 따로 있다. 그것은 몸보다 기운을 단련시키는 전신적인 에너지 조정 운동이다. 운동이라 하여 숨이 차도록 뛰게 하거나, 용을 써가며 땀 흘리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運動이 아니라 勞動이다. 힘을 쓰지 않고 호흡에 따라 천천히 움직여 주는 운동, 숨차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하는 운동, 온몸에 에너지..
돈오(頓悟)란 단박 깨우침이다. 그것은 언제 올지 모른다. 기다린다고 빨리 오지 않는다. 도무지 예상할 수 없다. 도적같이 온다. 누구는 샛별을 보고, 누구는 닭 우는 소리에, 누구는 스승의 말 한마디에, 누구는 책을 읽다가, 누구는 절망적 죽음 직전에 홀연히 깨달음이 왔다고 한다. 또 며칠을 걸려 마치 아침 해가 솟듯이 서서히 밝아졌다는 사람도 있다. 頓悟가 오고 나면 마음이 잡히고 본격적인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의심들이 풀려나간다. 그 후에는 경전이나 선배들의 어록을 읽거나 선지식들을 직접 만나 내 깨달음의 진위(眞僞)를 가늠하여 의심들이 남김없이 사라져야 한다. 그것을 통해 화두(話頭)는 물론이거니와, 깨닫겠다는 마음 역시 완전히 타파되어야 한다. 그것이 해오(解悟)이다. 頓悟와 解悟가 분명하..
깨달음에는 등급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글을 통해서 오디오나 영상물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선 스스로 그것이 모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더 해보는 것이 현명합니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네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일곱 번의 생을 더 닦아야 아라한이 된다는 예류과(豫流果) 수다원, 한 번만 세상에 더 왔다 가면 아라한이 된다는 일래향(一來向) 사다함, 세상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불래(不來) 아나함, 마지막 지위 최고의 극치(極致)를 무적(無敵) 아라한이라 했습니다. 도반(道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더러 부족한 점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공부를 더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망할 일은 아닙니..
대덕(大德)이 법상(法床)에 올라, "육신은 마음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문제가 생긴 것은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명(高名)하다는 그의 추종자는 자기가 자주 병으로 고통받는 것에 대하여 반성하지 않습니다. 그는 석가도 설사병으로 길에서 죽었으므로 자기의 문제들이 당연하다고 변명합니다. 그는 육체는 다스릴 필요가 없으며, 깨달음과 건강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게으름을 부려 몸과 마음에 氣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스려 몸을 바꿀 수도 있지만 몸을 다스려 마음을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 둘은 필히 함께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것을 성명쌍수(性命雙修)라 합니다. 그것들이 다스려지는..
止觀을 알면 깨달음이 보인다. 깨달음에 이른다는 셀 수 없이 많은 방편들이 있어도 알고보면 하나같이 모두 止觀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지(止)란 - 그치다, 멈추다 - 라는 뜻이며, 관(觀)이란 - 보이다, 인식(認識)되다 -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와 관은 연기관계이므로, 그 둘이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가 있으므로 관이 있고 관이 있으므로 지가 있다. 그 둘은 편이상 그리 이름하였을 뿐이며, 사실상 둘은 하나다. 그러므로 둘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구름이 걷히면 저절로 태양이 드러나듯, 지는 그대로 관을 부른다. 망상이 그치고 나면 굳이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이 저절로 보여지는 것이 本性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없도록 구조되어 있다. 무엇 하나에 생각..
벌판 끝에 있는 앞산이 제일 높은 산인 줄로만 알았던 때가 있었다. 아무도 그 산에 오르려는 아이는 없었고, 형들은 그 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했으나 믿지 않는 아이들도 간혹 있았다. 아이들은 봄 바람이 불어오는 산너머에 누가 사는지 늘 궁금해 했다. 하루는 행방불명 되었던 바보 '석두(石頭)'가 산너머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앞산 뒤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긴 강이 있었고, 강을 건너면 앞산보다 훨씬 더 높은 산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석두 친구들이 용기를 내어 석두처럼 앞산 정상에 올랐는데, 석두 말처럼 눈 앞에서 또 다른 높은 산들을 보았다. * * * * * 見性이 구경열반(究竟涅槃)이며,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
자서전(自敍傳)을 읽을 때는 반은 접어 읽어야 합니다. 본인이 직접 쓴 글이든, 고용된 작가에 의해 쓰인 글이든 말입니다. 경전(經典)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經典은 중심인물이 죽은 지 상당한 기간이 흐른 후, 그의 신도(信徒)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소 과장된(?) 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내용 중에는 중생(衆生)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라(口羅)라고 느낄 대목이 적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Bible을 읽으면 당연히 하느님이 감응되어야 하며, 불경(佛經)이나 조사어록(祖師語錄)들을 읽으면 즉시 깨달음과 가까워져야 하는데...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로, 오히려 經典을 많이 아는 사람들이 그것..
깨달았다는 사람이 법상(法床)에서 자기 건강과 병에 대해 하소연하는 것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요? 깨달은 사람은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건강해진다고 필자는 믿고 있습니다. 질병의 원인 중 대부분은 스트레스요, 절제하지 못하는 식생활과 불규칙한 생활습관 때문입니다. 음식 조심하고, 적절한 운동과 함께 명상을 생활화하면, 웬만한 병은 시간차로 사라지고 맙니다. 깨달았다는 사람이 절제하지 못하고, 건강에 어긋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면 그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도 설사병 걸려 길에서 죽었다는 말로 그의 문제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백장(百丈)의 불매인과(不昧因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한 노인이 찾아와, "자기가 과거 이 절의 주지(住持)였는데, 학인(學人)의 ..
집중력을 기르는데 단전호흡(丹田呼吸)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 내 몸과 마음에 에너지장(energy field)을 만들어 좋은 컨티션을 유지하게 해줍니다. 수행자에게 건강은 말할 필요 없이 중요합니다. 건강이 허물어지면 고차원적 수행을 진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초보자는 숨 쉬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나머지 것들은 거의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식호흡이 무르익어 단전(丹田)을 알게 되고, 마침내 단전으로 숨을 쉬게 되면, 단전이 부풀고 꺼지는 느낌과 함께 그것을 운영하는 "무엇"까지 동시에 알아채게 됩니다. 나아가서 무위(無爲)로 단전호흡이 이루어지게 될 때쯤에는 텅 비어있는 고요함 속에 세상 모든 것이 한통속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판타지(fantasy) ..
구년면벽(九年面壁)은 달마(達磨)가 양무제(梁武帝)와의 대화 후, 숭산(嵩山) 소림사(小林寺)에서 했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며, 仙道의 삼년유포(三年乳抱) 이후 마무리 수련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년면벽이란 무엇인가? 불가에서는 이것을 마음을 바로 보아 본처(本處)를 찾는 수행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달마는 그때까지 견성(見性)을 하지 못했단 이야기인가? 양무제와의 그 당당함은 출처가 무엇이란 말인가? 견성만이 모든 것이라 믿었던 달마는 중국에 와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것은 돈오점수(頓悟漸修)였던 것이다. 이는 그 이후 달마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9년 동안 命 공부, 즉 성명쌍수(性命双修)를 행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그는 능엄경(楞嚴經)의 神仙, 화엄경(華嚴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