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72)
谷神不死
견성(見性)을 마친 무사인(無事人)에게 극락왕생이 필요할까? 見性을 하셨다고 떠들썩하던 고명(高名)한 선객(禪客)이,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된다는 정토종(淨土宗)으로 개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도 말년(末年)에... 앉기만 하면 참선, 무아(無我)를 빼고는 말을 못 하던 분이 말이다. 정말로 속 깊게 그를 폄하할 수 있는 사람이 혹시 있다면 앞으로 당당히 나서보라. 내가 물리적인 방법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해 주겠노라. 생사(生死)가 일여(一如)라 할지라도,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생명은 생명이라 생각하는 것이 중심 잡힌 견해(正見)라고 필자는 믿는다. 상(相)이 허망(虛妄)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건만, 즉견여래(卽見如來) 이후에도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역시 本來面目이 아니겠는가?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란 시심마(是甚麼; 이 뭣고?), 삼서근(麻三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뜰앞 잣나무) 같은 단순한 말, 염불(念佛)이 아닙니다. 몸(가슴)과 마음 어느 구석에 턱 걸려서 뿌리치기 어려운 조건이 안 된다면 화두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선도(仙道)의 소주천(小周天) 공부를 하다 보면 순조롭게 기맥(氣脈)이 통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삼관(三關)을 통해야 한다고 합니다. 소주천을 진행하다가 꼬리뼈(尾閭)에서든, 등 중앙(脊中)에서든, 대추(大椎)에서든, 氣가 걸려 얹힌 것처럼 꼼짝없이 흐르지 못하면 오히려 즐거워해야 합니다. 수행을 지속하는 한 조만간 열리게 되어 있고, 그것은 밝음으로 통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맥(脈)이 뚫려 나갈 때 그 개운함이란 무엇에도 비..
예수님의 주제는 '영원한 생명(永生)'이고, 싯다르타(석가모니)가 결정적으로 발심(發心)하게 된 것 역시 진리(眞理) 추구보다는 강가에서 시체 태우는 것을 보고 나서입니다. 선문(禪門)의 대가 전강(田岡) 선사의 발심(發心)도 어려서 죽은 도반(道伴)을 다비(茶毘)한 연기가 하늘에 맴돌고 있는 것을 보고 지울 수 없게 자리 잡았답니다. "생자(生者)는 필멸(必滅)이야. 오래 살면 뭐해? 어서 죽어야지." 같은 맘에 없는 말,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부정적 말은 행여라도 따라 하지 마세요. 사람의 속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도서 3:11)이 있다는 솔로몬의 말을 선도(仙道)와 우리 모두는 적극 지지해야 합니다.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깨닫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돈오(頓悟)'라고 합니다. 주문(Mantra)을 외워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명상(冥想)을 통해서, 화두(話頭)를 들어서도, 물론 경전(經典) 공부를 통해서도 깨닫기 어렵습니다. 가장 쉬운 길은 깨달음을 얻은 스승 앞에 마주 앉아 그의 에너지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속는 셈 치고, 신뢰가 가는 선지식에게 자기를 맡기십시오. 그에게 깨닫게 해 놓으라고 떼를 쓰듯 매달리십시오. 그것보다 더 수월한 것은 없습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깨달음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조만간 다시 구할 것이 있음을 안다. 늘 말하지만, 이(理), 즉 성(性)은 기(氣)가 작용을 해줘야 제대로 행세를 할 수 있다. 불도(佛道)에 심취하여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성명(性命)에 대하여 이야기해 줘도, 무아(無我) 연기(緣起)만을 반복하여 말할 뿐이다. 억지로 설득하려 하지 말라. 하지만 그가 일단 깨달음을 얻고 나서 그것이 무미건조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스스로 알게 된다. 깨달았어도 여전히 삶이 녹록지 않고, 소화불량에 순환기 장애, 혈당 불균형이 지속하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배가 고프면 밥부터 먹어야 한다. 아무리 밥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고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일단 자성..
깨달음을 일별(一瞥)하였다 할지라도, 신뢰하는 스승에게 귀의(歸依)가 없는 한 그야말로 일별에 그치고 만다. 그것은 거의 모든 각성자(覺醒者)들의 공통적 의견이다. 물론 여기서의 스승이란, 살아있는 선지식(善知識)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 숨 쉬지 않는 경전(經典)이나 어록(語錄), 그리고 매체(媒體)는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작용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물론 움직이기 어려운 인연(因緣)을 타고난 수행자에게는 예외이지만 말이다. 그것은 소주천(小周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의념주천(意念周天)이라면 모를까, 단전(丹田)이 깨어나고 여실(如實)한 기운에 의해 주도되는 소주천이라면 꼭 이미 주천을 이룬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분명히 깨달음의 인자(..
아는 만큼만 보이고 들리게 되어있다. 무언가 눈에 들어왔을 때, 그것이 무언지 모른다면 그냥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질 뿐, 아무 의미가 없다. 외국 영화를 볼 때 외워둔 단어나 문장이 귀에 들어오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들리지 않고 말이다. 가급적 상대가 관심 가진 것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좋다. 상대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 절대로 비위가 상할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며, 그도 아니면 차라리 입을 닫는 것이 좋다. 무소용이기 때문이다. '간을 본다'는 말이 있다. 初面의 경우는 상대의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부터 먼저 탐색해야 한다. 무턱대고 이야기를 꺼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 에너지(氣) 이야기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상대에 대한 배려로 誠..
본성(本性)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조건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하나같은 깨달음 속에 늘 자유롭다. 삼매(samadhi) 속에만 머물려는 사람이 있다.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누구로부터 성자(聖者)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그런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담배, 술, 마약, 채팅과 게임, 그리고 명상(?)을 통한 삼매(三昧)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을 좀 아는 듯 산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너무 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편안함이 아니다. 조건 속에서만의 편안함이기 때문이다. 순경계(順境界)이든 역경계(逆境界)이든, 가리지 않고 편안해야 바른 깨달음이다. 깨달은 사람은 굳이 무념무상(無念無想)조차 말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 속에서도 늘 자유롭기 때문이다.
7살까지 보고 들은 것이 나머지 인생을 결정한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각인된 카르마(業)에 의해 걸맞은 인생을 살게 된다는 말도 있다.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틀린 주장이다. 변수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으며, 부자라도 불행할 수 있다. 또한 가난은 벗어날 수 있는 것이며, 부자가 망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무엇보다 자기가 누군지부터 알아채야 한다. 눈이 뜨이면(開眼) 가난도 부유함도 개의치 않고 살게 되며, 어찌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어찌해야 부자를 유지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된다.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든, 어떤 카르마를 가지고 태어났든, 개의치 말라. 당장 꿈에서 깨어나라. 지금 깨어나면 카르마 같은 것은 물거품에 불과하다.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간에, 먹어야 하고 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떤 고매(高邁)한 이론을 전개한다 하더라도, 신앙이 아무리 두텁다 할지라도 말이다. 깨달음을 논(論)하는 자리에 가면 거기에 우리의 삶은 없다. 모든 것이 무시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 우리는 일상(日常)으로 돌아온다. 또 다시 혼란과 고통 속으로 돌아오고 만다. 깨달음 공부와 우리의 삶이 일치를 이루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깨달음 속에 우리의 삶이 있고, 우리의 생활 하나하나가 깨달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명쌍수(性命雙修)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사라져 우주와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며 산다고 해도,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