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72)
谷神不死
나는 내가 어떻게 숟가락을 들고, 혀로 맛을 보고, 식도로 밥을 넘기고, 위장에서 음식을 소화하는지 모르지만, 그것들을 행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다. 단순히 하겠다고 마음만 먹은 것일 뿐인데, 그 모든 기적이 일어난다. 꽃향기를 맡고, 두 발로 뛰어다니고, 생각이 즉시 말로 나온다. 무엇이 숨을 쉬게 하고, 밥을 먹고, 말하게 하는가? 그 '무엇'은 내가 아닌가? 그것이 내가 맞다면, 어쩌다 나는 분리되었는가?
호흡에는 순호흡(順呼吸)과 역호흡(逆呼吸)이 있으며, 경기공(硬氣功)이 아니라면 순호흡 채택을 권장한다. 공(功)을 기르기에는 역호흡이 유리하지만, 부작용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공(內功)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두 가지 호흡의 복합형, 즉 태극호흡(太極呼吸)을 한다. 부작용도 없고 功을 기르기에도 좋은 일거양득이 있기 때문이다. 소주천(小周天)을 하기 위해선 필히 태극호흡이 필요한데 숙달을 위해선 외단공(外丹功)으로 기초를 잡아 두어야 한다. 축기(蓄氣)를 위해 혹자는 많이 마시고 적게 내쉬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도 없거니와 정작 그리한다면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은 변함이 없되 숨 속에 있는 氣(元氣)만을 갈무리하는 것이 蓄氣이며, 태극호흡이다..
공부는 성명쌍수(性命雙修), 즉 性과 命을 동시에 닦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견성(見性)이 먼저이고, 이어서 득명(得命)을 하는 것이 무난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누구나 이미 견성해 있기 때문이다. 부언하자면 견성이란 자기(性品)를 깨우치는 것(見)이며, 득명이란 命[생명(生命)과 사명(使命)]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은 형편을 따라야 한다. 인연이 다르게 풀린 사람, 이를테면 선도(仙道) 인연을 먼저 만난 사람은 당연히 축기(蓄氣)와 소주천(小周天) 공부를 먼저 할 수밖에 없다. 性과 命을 동시에 닦지 않은 스승을 만났더라도 따지지 말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라고 권하고 싶다. 性 공부든 命 공부든 어느 쪽이든 지성(至誠)으로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명(性命)을 통한 스승(眞師)을..
중도(中道)를 안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중용(中庸)과는 비슷하면서 다릅니다. 중용이란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은 도리에 맞는(中) 것과 떳떳하고 불변적인(庸) 것을 말하지만, 중도는 양쪽을 모두 벗어난, 바로 깨달음의 자리,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불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즉 팔부중도(八不中道), 중도정(中道定)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중용과 중도, 둘 다가 필요합니다. 깨달아서 나머지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보살(菩薩) 혹은 신선(神仙)이라 합니다.
사람은 참 이상도 하다. 같은 깨달음을 얻었어도, 한쪽은 낙관적(樂觀的)으로 즐겁게 사는 반면에, 다른 한쪽은 비관적(悲觀的)으로 자기를 괴롭히며 산다. 한쪽은 인생의 밝은 면을 비추며 다소 괴로운 일이 있어도 '무상(無常)'의 이치에 따라 즐겁게 살고, 다른 한쪽은 '인생은 결국 고통 뿐(一切皆苦)!'이라는 것을 가슴에 품고 괴로움을 낙(樂) 삼으며 살아간다. 한쪽은 무아(無我)를 '모두가 하나(oneness)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늘 감사하며 베풀어 가며 살지만, 다른 한쪽은 일체가 허망(虛妄)하다는 것을 늘 가슴에 새겨가며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 신앙(信仰)하며 산다. 한쪽은 살아있는 동안 험한 형편이나 다소 병약한 체질이라도 개선시키며 건강하게 살아가지만, 다른 한쪽은 삶에 대한 염세적..
道에 인연(因緣)이 없는 사람이 道門에 들어오려 하면 귀신이 이마를 쳐서 내쫓는다는 말이 있지만,반면에 道에 인연이 있는 사람은 조상신(祖上神)이 뒤통수를 밀어 道門에 들게 한다지요? 귀신과 조상신이 계신지는 확인할 길 없으나, 인연 없는 사람이 道門에 들어오기가 어려운 것은 분명합니다. 옆에서 아무리 권해도 마이동풍(馬耳東風)인 사람이 대부분이고, 어렵게 道門에 들었더라도 별스러운 일이 생겨 떠나게 되거나, 시나브로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 말입니다. 세상살이가 별 어려움이 없어도 문득문득 "이것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든다면 道에 인연이 있는 사람이고, 道門에 들어 있어도 세상일이 늘 마음에 걸린다면 인연이 멀다고 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생각 모두 망상(妄想) 아닌 것이 없겠지만, 사람..
하루 5분 종아리를 주무르면 면역력이 5배 오르고, 萬病이 다스려진다는 보고가 있다.종아리는 제2의 심장이라 하며 모든 臟器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고...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아리를 주무르는 것만 가지고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다고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게다가 그것은 남의 힘을 빌려야 한다. 자기가 하면 별로 시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면역력을 올리는 종합적인 방법은 따로 있다. 그것은 몸보다 기운을 단련시키는 전신적인 에너지 조정 운동이다. 운동이라 하여 숨이 차도록 뛰게 하거나, 용을 써가며 땀 흘리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運動이 아니라 勞動이다. 힘을 쓰지 않고 호흡에 따라 천천히 움직여 주는 운동, 숨차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하는 운동, 온몸에 에너지..
돈오(頓悟)란 단박 깨우침이다. 그것은 언제 올지 모른다. 기다린다고 빨리 오지 않는다. 도무지 예상할 수 없다. 도적같이 온다. 누구는 샛별을 보고, 누구는 닭 우는 소리에, 누구는 스승의 말 한마디에, 누구는 책을 읽다가, 누구는 절망적 죽음 직전에 홀연히 깨달음이 왔다고 한다. 또 며칠을 걸려 마치 아침 해가 솟듯이 서서히 밝아졌다는 사람도 있다. 頓悟가 오고 나면 마음이 잡히고 본격적인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의심들이 풀려나간다. 그 후에는 경전이나 선배들의 어록을 읽거나 선지식들을 직접 만나 내 깨달음의 진위(眞僞)를 가늠하여 의심들이 남김없이 사라져야 한다. 그것을 통해 화두(話頭)는 물론이거니와, 깨닫겠다는 마음 역시 완전히 타파되어야 한다. 그것이 해오(解悟)이다. 頓悟와 解悟가 분명하..
깨달음에는 등급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글을 통해서 오디오나 영상물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선 스스로 그것이 모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더 해보는 것이 현명합니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네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일곱 번의 생을 더 닦아야 아라한이 된다는 예류과(豫流果) 수다원, 한 번만 세상에 더 왔다 가면 아라한이 된다는 일래향(一來向) 사다함, 세상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불래(不來) 아나함, 마지막 지위 최고의 극치(極致)를 무적(無敵) 아라한이라 했습니다. 도반(道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더러 부족한 점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공부를 더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망할 일은 아닙니..
대덕(大德)이 법상(法床)에 올라, "육신은 마음의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문제가 생긴 것은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명(高名)하다는 그의 추종자는 자기가 자주 병으로 고통받는 것에 대하여 반성하지 않습니다. 그는 석가도 설사병으로 길에서 죽었으므로 자기의 문제들이 당연하다고 변명합니다. 그는 육체는 다스릴 필요가 없으며, 깨달음과 건강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게으름을 부려 몸과 마음에 氣 장애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스려 몸을 바꿀 수도 있지만 몸을 다스려 마음을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 둘은 필히 함께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것을 성명쌍수(性命雙修)라 합니다. 그것들이 다스려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