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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세상엔 모으기만 하고 버릴 줄은 도통 모르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깨끗이 정돈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도 있다. 세상엔 남들이 주장 하는 것이나, 글로 써진 것에 대해 의심치 않고 따르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의 진위(眞僞)를 따져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다. 세상엔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삶이란 무엇이며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소유에만 정신을 팔고 사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러한 것들의 의문을 풀고 살지 않는다면 개 돼지의 삶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사는 사람도 산다. 당신은 어느 쪽 편의 사람인가? 비교적 前者에 속하는 사람이라 생각된다면 그대로 살다 가면 된다. 그리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그 많은 씨앗 가운데 극소수만 싹이 터도 존재계는 유..
견성(見性)은 성품(性品)을 보는 것(見)이다. 고로, 보는 기능(개안; 開眼)이 필요하다. 도안(道眼), 심안(心眼), 혜안(慧眼), 신안(神眼), 천안(天眼), 불안(佛眼)이라 하는 안목(眼目), 그것 말이다. 그 눈은 내외(內外)나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무엇이든 보고 들을 수 있는(觀自在; 관자재) 축복 중 축복이다. 하지만 중생(衆生)들의 눈과 귀는 그 초점이 외부(外部)로만 맞추어 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기독(基督), 힌두, 불도(佛道) 가릴 것 없이 그 많은 수행자들이 평생 애를 써도 견성 이루기가 그리도 어려웠던 이유는 눈(眼識; 안식)을 안으로 되돌리는 것(回光返照; 회광반조)에 대해 무지(無知)하고 서툴기 때문이다. 알아..
우리는 두 개의 의식(意識)을 교차하면서 살고 있다. 체(體)는 순수의식, 즉 내부(內部)의식이 맞지만, 육근(六根; 眼耳鼻舌身意)을 관장한 현재(顯在)의식, 즉 외부(外部)의식이 그 용(用)을 맡아 주인 행세를 하며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의 비극인 어리석음, 탐심, 성냄 모두가 외부의식에서 연유한다는 것에 이의는 없지만 내부의식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다 할 수 없다. 비록 내부의식의 성향이 선악분별이 없고 늘 如如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깨달음이란 단단히 자리잡은 외부의식 진영을 통과하여 내부의식의 고지에 있는 통제부를 장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내부의식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진치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각각 분야별로 많은 방법론이 있었지만, 압권은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가 아닌가 생각한다. "병 속의 새 꺼내기"란 이야기가 있다. 아기새를 병속에 넣고 키웠는데 새가 자라서 병밖으로 나오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새를 병을 깨지 않고 새도 다치지 않게 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불가의 화두(話頭)이다. 내려 놓아라. 살불살조(殺佛殺祖)하라 한다. 그런데 무엇을 죽인단 말인가? 이 마음을 빼고 내려 놓을 것은 어디에 있으며, 죽여야 할 부처나 조사(祖師)는 어디가서 찾는단 말인가? 냉장고도 없고, 코끼리도 없으며, 병도 없고, 새도 없다. 깨달아야 할 것은 더더구나 없다. 그냥 이것일 뿐, 애를 쓸 필요는 어..
삼매(三昧)란 산스크리트어 'samadhi'의 음역이지만, 뜻글자인 한자어는 나름대로 그 의미를 부여했다. 삼매가 깨달음 용어이기는 해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먹고 자는 일상사 모든 일이 삼매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독서를 하고, 연애를 하고, 작업을 하는 모든 일이 삼매가 없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삼매의 한자적 의미는 "세 가지가 어둡다"이다. 그 세 가지는 '이것-저것-그것', '몸-숨-맘', '과거-현재-미래', '나-너-우리', '세간-출세간-내세' 등등 무엇도 될 수 있다. 핵심적인 것은 '어둡다(昧)'는 말에 있다. 통상 어둡단 말은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어둡다는 것은 '관심 갖지 않는다'로 받아들이면 된다. 우리가..
見性이 없는 가운데 진행하는 수련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그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견성은 단지 자기를 보는 것에 불과한 것이어서, 어린이든 노인이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뜻을 이룰 수 있다. 어떠한 지적(知的) 준비도 미리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알음알이 없이 무식하게 들이대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먼저 見性부터 해야한다. 견성을 하면 여러가지 면에서 세상살기가 훨씬 편해진다. 깨달음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두 가지를 알게 된다. 하나는 생각이 피어나는 마당, 시간이 끊어진 텅빈 공간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을 알아채고 있는 묘한 존재감이다. 두 가지 모두 알고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
모든 견성공부(見性工夫)는 대상(對象)에 대한 몰입(沒入)으로 시작한다. 기도(祈禱), 지관(止觀), 간화선(看話禪), 관상(觀想), 염불선(念佛禪), 단전호흡(丹田呼吸) 등등 모든 수행(修行)의 귀결(歸結)은 사마디(Samadhi), 즉 삼매(三昧)이다. 선도(仙道)는 의식(意識)으로 氣(에너지)를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의수단전(意守丹田)으로 삼매(三昧)에 이르고 그것을 통해 견성(見性)한다. *의수단전이 중심(中心)이 되어야 하는 이유: 氣는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의 양쪽에 걸쳐 생명력(生命力)의 원천(源泉)이며, 상대계(相對界)와 절대계(絶對界)를 수렴(收斂)한다. 氣는 본성(本性)에 가장 가깝다. 즉, 수련(修鍊)의 과정(過程) 중 모두가 유실(流失)되어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몸과 마음은 하나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마음도 불편하기 마련이며, 마음이 불안한 가운데 몸만 편안할 수는 없다. 마음이 파악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며, 몸 전체의 에너지(氣) 운행이 원활해져 생명력이 신장된 것을 득명(得命)이라 한다. 득명이란 진짜 생명을 얻었다는 말이며 그리되면 늘 상쾌한 컨티션이 유지되며 노화가 눈에 띄게 느려진다. 득명이란 말이 낯선 이유는 오랜 세월 마음 중심의 행법이 중요시된 나머지 몸(에너지)수련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왔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오직 마음뿐이고 육체는 불결한 것이므로 하루 빨리 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가르침까지 있다. 그들은 마음만을 실재(實在)라 믿고(一切唯心造), 몸은 가상(假像)의 것으로 제거 대상이라 생각해 왔다. 필자로선 썩 이해가 안되는 주장이다..
깨달음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정말 무아(無我)가 맞다면, 도대체 누가 깨닫는단 말인가? 종내 깨달을 사람이 없다면 깨달음은 무엇을 의존하여 있단 말인가? 깨달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산이 산인 줄 알고 물이 물인 줄 아는 것이 깨달음인가? 알고 보니 ‘그것’이 ‘그것’인 것을 가지고 그리도 법석을 떨었단 말인가? 바람 부는 날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현관문 열고 마당으로 나간 적이 있다. 분명 인기척을 느겼고 문 흔드는 소리도 분명했는데 문밖에서는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잠시 동안 멍하게 서있었는데 그것을 깨달음이라 할 수 있을까? 깨달음이란 그저 편안함을 회복한 것이 아닐까? 이미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얻었다 할 수 있을 까? 착각을 바로 잡았을 뿐 아닌가? 갈아입을 여름 옷 주머니에 손을 넣으..
견성(見性)이라는 말은 ‘성품(性品)을 보았다’ ‘깨달았다’는 말이며 적확치는 않으나 인도 말 보디(Bodhi)의 한자적 번역이라 보면 어떨까? 문화라는 것은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널리 통용되는 것이라서 그것이 중국에 전해질 때 그것에 거의 가까운 표현인 ‘견성’으로 번역했다고 본다. 현 불교문화가 상당한 부분 한자문화권의 영향을 받았으며 선불합종(仙佛合宗)의 견지에서 견성을 선도(仙道)의 의미로 새겨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 이 글을 쓴다. 선도 수행의 시작에 기(氣)를 체험하게 되는데 그것을 초견성(初見性)이라고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기 역시 존재의 본원인 허(虛)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기존의 인식에서 한 단계 점핑하는 것이라 본다면 기를 체험한 것 역시 한 단계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