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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손가락

생각을 내려놓고 그저 보라!

thedaywemet 2018. 5. 21. 11:22

견성(見性)은 성품(性品)을 보는 것()이다. 고로, 보는 기능(개안; 開眼)이 필요하다. 도안(道眼), 심안(心眼), 혜안(慧眼), 신안(神眼), 천안(天眼), 불안(佛眼)이라 하는 안목(眼目), 그것 말이다. 그 눈은 내외(內外)나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무엇이든 보고 들을 수 있는(觀自在; 관자재) 축복 중 축복이다.


하지만 중생(衆生)들의 눈과 귀는 그 초점이 외부(外部)로만 맞추어 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기독(基督), 힌두, 불도(佛道) 가릴 것 없이 그 많은 수행자들이 평생 애를 써도 견성 이루기가 그리도 어려웠던 이유는 눈(眼識; 안식)을 안으로 되돌리는 것(回光返照; 회광반조)에 대해 무지(無知)하고 서툴기 때문이다.   


알아채야 한다. 깨달음의 여정은 눈뜸(開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觀자재보살, 觀세음보살을 음미해 보라. 하나같이 觀(look)이 주제 아니던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開眼이다. 그리되어야 구애받음 없이 보고자 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기(觀自在) 때문이다.


시타르타가 사념처(四念處)를 말하고, 선도(仙道)가 의수단전(意守丹田)을 그리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開眼으로 직결되는 좋은 통로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대상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고 원하는 시간만큼 유지시킬 수도 있어야 한다. 


見性은 물 속에서 물을 찾는 작업이며, '눈이 눈을 보는 일'이라 비유한다. 눈은 무엇도 볼 수 있으나 자신만은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自在로운 눈이 필요한 것이다.


開眼을 이루고나면 見性은 따논 당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것을 견처(見處)를 얻었다고 한다. 그 후엔 보지 않으려 애써도 보여지고 마는 것이 性品이기 때문이다.


물론 체험이 풍부한 가이드(師; 스승)가 있다면 가는 길이 편하고 마무리가 속(速)하겠지만 말이다.

 

누구에게나 心眼은 살아 있고, 시시각각 기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것이 慧眼을 사용치 못하는 큰 이유가 된다. 기능하고 있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기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방하착(放下着)하라

켜진 전등을 다시 켤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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