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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밝아지면 아공법공(我空法空)의 경지에서 저절로 팔정도(八正道), 육바라밀(六波羅蜜)이 이어지게 되어 있다.六波羅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며, 강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중언부언하면 장삿속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我空法空의 깨우침이 정견(正見 )이며,바른 견해를 얻으면 八正道는 물론이거니와, 六波羅蜜 역시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 깨달음을 얻으면 마음에서 우러나 저절로 보시(布施)가 나오고,본래면목(本來面目)에 기초한 지계(持戒), 인욕(忍辱)이 이루어질 때,정진(精進), 선정(禪定)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으며, 그것이 그대로 지혜(智慧)로 연결된다.육조혜능은 오직 견성(見性)만을 말할 뿐, 선정 해탈은 말하지 않았다.오직 깨우침에 힘씀이 우리의 삶이며,그것을 얻으면 그것을 유지시킬 에너지와 계합(..
명상(冥想)을 서양 말로 Mindfulness라고도 합니다. Mind는 "정신" 혹은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며, ful은 "가득 찬(빈 공간이 없이)", "경계가 없는"이란 의미입니다. 명상(Meditation)은 스트레스(마음의 끄달림)를 해소하는 약(Medicine)으로 요즘은 의사가 처방하게 되었지만, 깨우침(자기에 대한)을 위해서 매우 유용한 방편(方便)입니다. 명상을 가지고 우열을 따질 수는 없습니다. 각기 자기에게 맞는 것이 최선입니다. "꿩 잡는 것은 매"이기 때문입니다. 민족마다 기법(技法)은 달라도 각각 자기들의 명상이 있습니다. 인도의 Mantra명상, 중국불교의 선(禪), 유도(儒道)의 거경(居敬), 선가(仙家)의 의수단전(意守丹田), 기독교의 관상(觀想), 이슬람의 Sufism, ..
"알겠다"라고 말할 때는 'I know'가 아니고 'I see'이다.'I know'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할 때이고, 지금 알게 된 것은 'I see'이다.See라는 단어는 '본다'와 '안다'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본다(See)'는 단지 눈으로 보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우리는 들어보고, 맡아보고, 먹어보고, 맛을 보고, 느껴보고, 알아본다.그러므로 견성(見性)에서의 見은 단지 '본다'는 의미 외에 '깨닫는다'는 의미가 있다.하지만 그것이 관념적이어선 안 되며, 실제의 체험이 필요하다.그래야 見(See)의 본래 의미와 부합되기 때문이다.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을 때, '그것(性)'을 단지 '본다'고 했지만선사(禪師)들은 그것을 Clear 하게 밝히지 않고, 은유(隱喩)를 사용한다. 그..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서 당당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 그것이 자부심(自負心), 즉 머리 들고 살게 하는 힘이다. 하지만 이유 없이 자기를 고정하고, 위축시키며 사는 사람이 있다. 자기의 가치와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이 그러하다면 크게 깨우쳐야 한다. 세상에 있는 무엇도 필요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에게 자부심이 없다면 자기를 닦아서 해결해야 한다. 그리하여 진면목(眞面目)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쓸데없이 타인을 시기 질투하는 것은 큰 손해다. 스스로 열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얼치기 자부심은 내려놓아야 한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누구라도 찾아가 배워야 한다. 자기를 폐쇄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자부심을 지니며 당당하게 사는..
견성(見性)이란 움직이지 않는 그 자리, 세상에 두루한 그 자리를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알려면 마음(생각)을 쉬게 하고, 마치 렌즈로 먹지를 태우듯이 초점을 잡고 기다리면 됩니다. 간단합니다. 깨우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다고 말입니다.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깨닫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자성(自性)을 보았다고 자랑할 때 일단 인정한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언행(言行)을 보아가며 다시 하나 하나 질문해 들어간다. 그러면 그 사람이 처음에 일별(一瞥) 했을 때와 다른 현재의 상태를 알 수가 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를 말하지만, 공부가 담박 끝나는 것으로 나는 보지 않는다. 신통방통한 말을 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 질문을 이어가면 감정통제를 못하는 것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끝나도 끝난 것은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것을 수행에 적용하면 그대로 들어맞는다. 수행이야말로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다. 가고, 가고, 또 가지 않는다면, 확철대오(廓澈大悟)는 멀다. 늘 자기관..
정신적 편안함과 깨달음은 불가분의 관계다. 깨달음이란 해탈, 즉 편안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편안함이 지속되면 고요함을 알게 되고, 그것은 깨달음으로 연결된다. 누구라도 편안함을 체험하며 살지만, 그들에게 깨달음이 없는 이유는 생각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많이, 더 높이, 더 확실한 물질적 안정만을 추구한다. 그것은 깨달음과는 다른 길이다.
자성(自性)은 무궁무진한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알아차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가 모를 뿐 그것에겐 우리에게 필요한 것, 모두를 이루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깨우쳐야 합니다. 수표를 단지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불쏘시게에 지나지 않습(無用)니다. 하지만 수표의 기능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무엇이던 필요한 물건을 구해 옵니다. 깨달음은 대단한 일입니다. 하느님(自性)을 알아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밥 담았던 그릇에 김치를 담았다가 비우고 다시 국을 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릇이 오렴되지도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설탕 만들던 회사가 라디오를 만들고 이제는 반도체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회사가 없어졌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개었다, 흐렸다 해도 마음은 마음일 뿐입니다. 성인(聖人)이 그리 말했다고 해서 앵무새처럼 그를 따라 “내가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내가 없어지는 날이 올 때까지는 나는 나에 기대어 살아야 합니다. 과연 언제 내가 없어질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