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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견성(見性)에 꼭 체험(體驗)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체험이 있으면 그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계기가 된다. 누구는 구름이 걷히며 백두산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누구는 "꼬끼오" 닭 우는 소리에, 누구는 장작불이 튀는 것을 보면서, 누구는 스승이 귀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또 최근의 인터넷 카페의 누구는 기차에서 우연히 자신의 뒷모습을 보는 눈이 생기더니... 체험도 참으로 다양하다. 왜냐하면 하늘은 우리 모두가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몇 번의 체험이 있었지만 그중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가장 강렬했던 것은 오래 묵혀왔던 왼쪽 옆구리 기맥(氣脈)이 "스르렁"하며 열렸던 체험이다. 그때는 정말로 통 밑이 쑥 빠지는 느낌이었다. 봉우(鳳羽) 선생님의 직접 지도를 받고도 ..
잠을 자고 있으면, 누가 밖에서 들어오거나 누가 밖으로 나가도 모른다. 선물을 가져와도, 도둑이 들어와도, 모를 뿐이다. 깨어있음이란 자각(自覺), 즉 "자기 本性을 알아채고 있음"이다. "깨어있음"이라는 말만 제대로 이해하면 공부는 거의 된 것이나 다름없다. 육창원(六窓猿)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창문 여섯 개는 안의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여섯의 감각기관이며, 원숭이는 정보를 총괄하는 성품(性品)이다. 깨어남은 애씀이나 고행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나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느냐에서 성패가 갈린다. 상근기(上根器)는 단지 스승의 말 한마디 "直指人心"만으로 담박 깨어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의 인연 따라 호흡법, 지관법(止觀法), 간화선(看話禪), 주력(呪力), 기도, 단전(丹田)호흡 등 ..
깨달음을 탐(貪)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깨달음의 기회가 오지 않는다. 크게 탐해야 한다. 욕심도 보통 욕심으로는 견성하기 어렵다. 화가 날 땐 화가 났음을 알려야 한다. 화내지 않는 사람은 깨닫기도 어렵다. 에너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이 人生이 분하지 않은 사람은 깨달을 수 없다. 그냥 그대로 한세상 살다 가면 그뿐이니까... 스스로 안다고 하는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달하려는 사람은 없다. 배부르다는 사람을 위해 밥상을 차려 줄 사람도 없다. 그리고 세인(世人)의 비웃음을 받지 않는 道는 道가 아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수많은 수행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Mantra(眞言)을 반복해 외우기, 몸, 느낌, 마음, 그리고 인식 대상(身受心法)을 차례대로 관(觀)하며 열반(涅槃)에 이르기를 구하는 방법(위빠사나), 묵묵히 마음을 비추며 실재(實在)를 찾는 방법(默照禪), 화두(話頭)를 의심하는 방법(看話禪)이 있으며,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고, 많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와 조사(祖師)들은 그런 것보다 대면하여 깨달음을 설명하거나 불쑥 질문을 던지므로 자성(自性)의 발현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것을 직지인심(直指人心) 일승법(一乘法)이라고 합니다. 어떤 깨달음 법이 당신의 마음에 와닿습니까? 이왕이면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돌진하는 것이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깨닫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견성(見性)과 소주천(小周天)은 선도(仙道)교사의 필수 덕목입니다. 선도 교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쳐야 하므로, 본인부터 먼저 숙지해야 합니다. 견성은 자성(自性)의 깨달음, 즉 자기를 아는 것이고, 소주천은 내 몸의 에너지를 통하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견성과 소주천은 이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으며, 그 둘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그 둘은 옛날엔 평생을 바쳐서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자동차 운전이 옛날엔 10년을 조수로 따라다녀야 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학원 한 달만 다녀도 누구나 하는 것이듯 말입니다. 견성과 소주천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관심사가 다른 데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심사가 여기에 ..
요리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대출까지 써 가며 몇십 년 요리 연구를 하는 중에 얕은맛은 없어도 기운(氣運)이 돌아서 웬만한 병은 저절로 사라지며, 안목(眼目)도 열리는 신기한 음식을 개발해 냈답니다. 혼자 먹기 아까워서 사람들을 초대하여 정성으로 만든 음식을 대접했지만, 반응은 예상과는 다르게 그리 시원치 않았다지요. 사람들은 달고, 맵고, 기름이 흐르는, 우선 입에 맞는 음식들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답니다. 어느 날부터 그는 초대하기를 중지하고 음식을 조금씩만 만들어 가치를 아는 사람들끼리만 나누기 시작했답니다. 물론 대문은 언제나 열려 있고 애써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맛보기 음식을 한 접시씩 내준답니다. 그는 늘 편안하답니다. 음식 장사를 할 것은 아니니 손님이 적어도 행복하답니다. 그의 꿈은 우리가 경..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양심에 걸려서 거짓말을 못 하겠다.", "나는 양심상 그를 죽일 수 없어.", "그것은 개인의 양심 문제야.", "그것이 그의 양심이라면, 나는 비양심이란 말인가?", "양심적으로 살아!" 이 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양심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은 良心을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말과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의식"이라 정의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두고 있군요. 맞습니다. 양심은 거의가 개인적입니다. 검사는 검사의 양심이 있고, 변호사는 변호사의 양심이 있습니다. 집단적 양심이라 할지라도, 개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충효(忠孝) 사상이나 신앙(信仰), 그리고 도덕적 윤리가 양심의 기준이 될 ..
"문 닫고 들어와"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찌 문을 먼저 닫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세상엔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는 법입니다. 실내(室內)에 들기 위해서는 먼저 문부터 열어야 합니다. 체기(滯氣)가 있는 사람에게 진수성찬이 무슨 즐거움이 될 것이며,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에게 고가과외(高價課外)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소귀에 경 읽기"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예불(禮佛)이나 108拜가 무슨 소용이며, 애써 금강경(金剛經)을 필사(筆寫)하고 외워본들 과연 미신(迷信)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부처란 자기를 아는 사람이며, 견성(見性)이란 자기 성품(性品)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먼저 깨달음을 얻은 후, 염불(念佛)도 하고 간경(看經)도 해야 합..
견처(見處)를 얻으면 여러 가지 변화가 있지만, 특히 집중력과 마음의 평정(平定)이 오래 유지된다는 점이 만족할만합니다. 너그러워져서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날카로웠던 마음이 둔화(?)되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닌 것은 기억하지 않게 됩니다. 잘못되어 불쾌한 지난 일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게 되고, 과거에 아팠던 기억이 거의 희석되어 버리는 등, 좀 바보스러워집니다. 미래에 대해서 좋게 기대는 하지만, 집착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꼭 기억해야 할 일은 잘 챙기고, 한편으론 무척 영리해집니다. 물론 기준은 자기에게 있지만 말입니다. 특히 어린이(학생)의 견성(見性)에 대해서는 강력히 추천합니다. 상위인지(Meta-cognition) 기능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어학을 비롯해 이해 ..
"道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는 말이 있습니다. 깨우침을 얻은 분의 명징(明徵)한 말씀입니다. 함께 공부를 하는 분 중에 상대성이론의 연구가이신 물리학 박사님이 계십니다. 명문대 교수이셨던 그 분은 지금 3개월에 運氣(小周天) 공부 마치는 연구를 하시고 계십니다. 혹시 의념주천(意念周天)이라면 모를까, 10년도 더 걸리는 사람이 많은데 말입니다. 그분의 주장은 "세상은 변했다. 과거 무지(無知)했던 시절엔 자동차 운전 하나를 배우기 위해 고생 고생하며 10년을 조수로 따라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한 달이면 면허까지 받을 수 있다"입니다. 그렇다면 개벽(開闢; Open & Open)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3개월 견성(見性)은 전혀 도전하지 못할 일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오래된 말 중에 "上才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