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 (320)
谷神不死
온 것은 가기 마련이다. 오고 감은 둘이 아니며, 온 것과 간 것은 모두가 물거품이요, 꿈이요, 허깨비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왔을 때 조심(調心)해야 한다. 그래야 실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갈 것이란 것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오지도 가지도 않는 놈으로 계속 지켜봐야 한다. 올 때 오는 것을 아는 놈이 있고, 갈 때 가는 걸 아는 한 놈이 있지 않은가? 정신적으로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시간을 보내다가 마음 하나 고쳐 먹자 심신에 평화가 왔고, 그 다음부턴 성인(聖人)의 말씀들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었다는 Y씨가 있고, 죽자 살자 선정(禪定)에만 들던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의 응어리가 확 풀려나가, 그야말로 해탈(解脫)을 이루었다는 K씨가 있었다. 두 사람 다 얼마 간을 잘난척하며 그렇게 지냈었는데, 시..
사람이 대체로 비슷하다고 하나, 사람 수 만큼 성향이 다름은 누구나 인지한다. 하지만 편의상 크게 나누어 세 가지 부류로 이야기 해보자. 하나는 이치(理致)를 중히 여기는 타입, 대체적으로 책 꽤나 읽었고 스스로를 지적(知的)이라 생각하는 부류이다. 두번째는 이치보다는 체험을 중히 여기는 타입, 모든 이론은 口羅(구라?)라고 생각하는 부류, 세번째는 이도 저도 아닌 타입, 가장 수가 많고 이랬다 저랬다 게으르고 귀찮은 것 싫어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부류이다. 여기서 조사어록(祖師語錄) 등에 나오는 상근기(上根器)라는 특별 타입은 예외로 하겠다. 말 한마디나 몸짓 하나에 퍼득 깨쳤다는 그 사람들 말이다. 아마도 그분들은 前生(?)이란게 있어 거기서 99.99% 이미 공부를 마쳤거나 누군가 재미를 위해..
무위의 삶 '사람이 평생동안 끄달리는 걱정꺼리의 99%는 경망스런 생각(妄想)이다'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근심은 심신만 상하게 할 뿐, 유사 이래 걱정으로 문제를 해결한 적은 없다. 그러나...경중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사람들은 평생 걱정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 "모두가 신의 뜻이야", "될 일은 될 것이고, 안될 일은 세상 없어도 안돼" 말로는 그리 하면서도 한시도 걱정을 놓지 못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어째서 그럴까? 한마디로 無知해서 그렇다. "그것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 하지만 근심이 일어나는 걸 난들 어찌해?"라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걱정이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에 달고 산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나 같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어찌하여 걱정에 묶여 살 수 밖..
깨달음의 보상 깨달음을 열반(涅槃)이라고도 부른다.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 'nirvana'의 음역으로 "고통의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 열반은 단지 "그 자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시작된다. 심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moksha)되고, 그 뒤를 육체적 안락(安樂)이 따르게 된다. 혹자는 "단지 마음의 끄달림으로부터만 벗어날 뿐, 육체적 문제는 여전하다"라고 주장한다. 충고한다. 당장 그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심신일여(心身一如)나 불이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망발이 아닌가?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니다. 어찌 마음이 편한데 몸은 불편할 수 있으며, 몸은 고통 가운데 있는데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가? 초견(初見)을 이룬 후 잠시 동안 그간 고통받던 신체적 어려움들이 남아있을 수 있다. 적..
믿음이란 확인이 불가능한 사항에 대해 실제성을 부여하는 것(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나타나지 않은 것을 증거(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로 채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스스로 선택했든, 타인에 의해 유도되었든 매우 주관적인 것이며, 설명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강요이다. 그 믿음이 혼자만의 것일 경우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강요되는 절대적 信仰(우러러 받드는 믿음)으로 탈바꿈 되고나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나는 믿음을 신앙으로 바꾸는 자들을 잘 이해한다. 그것이 그들의 재산과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와 眞理를 동의어로 만들고, 신앙을 종교(宗敎)라 주장하지만 결코 믿음이 진리일 수는 없으며 신앙이 종교일 수는 없다. 우리는 무엇이든 믿을 수 있지만 ..
仙道의 중심은 氣 질문 : 기독(基督)은 사랑을, 불도(佛道)는 견성見性을, 유도(儒道)는 사단(四端)을 중시하는데, 선도(仙道)는 왜 氣인가? 대답 : 그것만이 존재의 기초(基礎)이고, 오매일여(寤寐一如)하고, 世間과 出世間에 홀로 변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氣는 모든 것의 中心에 있다. 氣가 있으므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氣가 있으므로 見性이 가능하고, 氣에 근거하여 四端이 일어난다.
깨달은 사람이 정규직이라면 무명(無明)의 사람은 임시직에 비유할 수 있다. 깨달음이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음을 이해하는 것이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안 것이다. 임시직의 사람은, 절반의 임금에 승진기회가 없고, 남들이 기피하는 격무에 시달려야 하며,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 반면 정규직은 해고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며, 자신이 선택한 업무를 하고, 필요할 때 쉴 수 있는 자유도 보장된다.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는 삶에 대한 의무만 넘칠 뿐, 자유와 권리는 인정받지 못하며, 영문도 모르는 채 하루 하루를 고통 속에 보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깨닫는 순간 의무는 사라지고, 권리만 주장하게 될 뿐 아니라, 이치에 밝아지고 늘 안락한 가운데 감사할 일만 쉼없이 일어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만하면 깨달아야..
眞理는 모든 것이다. 진리에는 진리이고 진리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리이고, 저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사랑이다. 진리의 눈에는 모두가 하나로 보인다. 진리는 시기 질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는 다투지 않는다. 진리는 하느님이다. 진리에는 선악이 없다. 진리는 나누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에게는 다툴 대상이 없다. 진리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모두가 그로 비롯되었으며, 모두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문제다. 그들은 하느님을 욕보이고 있다. 언제나 하느님은 내편이고, 나의 믿음을 반대하면 그것은 하느님과 적이 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에게도 벌을 주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이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
깨달음의 경계 체증(滯症)이 모두 내려가 버린 듯...밑이 쑥 빠져 버린 듯 너무나 시원한 기분, 세상 이치가 모두 알게 된듯한 자신만만함, 내가 사라진듯 얽매어 있었던 것으로부터의 해방감, 표현하기 어려운 고요함 속의 안정감, 에너지가 넘치는 가벼운 몸, 발이 허공을 딛는 것 같은 느낌, 눈이 밝아진 듯 사물이 초롱초롱하게 보이고, 미래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신감, 天上天下唯我獨尊의 느낌, 그리고 한없는 행복감... 수행자에게 이런 신비스런 체험이 일어나면, 통상 '드디어 나에게도 깨달음이 왔구나! 고생은 끝났고, 이제부턴 행복 시작이야'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경하(敬賀)할 일이다. 결코 그것에 대고 초를 칠 생각은 없다. 그러나...그런 것들은 단지 지나가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오래지 ..
"먼 길을 돌고 돌아 목적지에 이르렀는데, 눈을 뜨고 보니 출발했던 그 자리였더라." "복숭아를 찾아 온 산을 뒤졌는데, 집에 와보니 앞마당에 복숭아 꽃이 피었더라." 그렇더라도... 먼 길을 돌고 돌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가 그 자리란 것을 어찌 알았겠으며, 온 산을 뒤지지 않았다면 앞마당 복숭아 나무 귀한 줄을 어찌 알았겠으랴 ! 무턱대고 '깨달음은 없다'라는 망발(妄發)로 순진한 중생들 헷갈리게 하지 말고, 그냥 가는 놈은 순하게 가게 하고 오는 놈은 조용히 오게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