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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당신도 깨달아 있다"라는 말을 늘 듣고 살아도 자신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깨닫고 나면 무언가 대단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자기가 누군지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들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見性이라고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일 뿐입니다. 이 몸을 "나"라고 할 수 없고, 이 마음이 내가 아니며, 나에게 부여된 어떠한 수식어도 "나"일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몸 안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나를 솔직하게 보고, 들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더 쉽다"고 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마치 불꽃처럼, 바람처럼..
돈과 권력, 명예를 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성령을 구하는 것도 내가 있기 때문이고, 깨달음을 구하는 것도 결국은 나를 위해서입니다. 하느님도 나를 위해서 있고, 부처님도 내가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가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깨우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입니다. 내가 없으면 누가 성령을 구할 것이며, 내가 없이 깨달음은 누가 구하겠습니까?
게으른 농부에게 봄을 알리는 노고지리(종달새) 소리는 단지 소음입니다. 배고프지 않은 사람에게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다른 여자에게 마음 뺏긴 남자에게 약혼녀 전화는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당신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세상을 모두 다 가진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선 입에 단 것이 곶감입니까?
이렇게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 할 때 이혼하는 겁니다. 도저히 이 나라에선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 이민 가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살다 가서는 후회만 남을 거라는 마음이 생길 때 깨달음 공부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대로 사는 맛이 있고, 이혼해봐야 별것 아니란 생각이면 다소 불만스러워도 섬기며 사는 겁니다.그래도 내 나라가 타국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면 이민을 포기하는 겁니다. 미음 고생, 몸 고생이 심하다 해도 별 뾰족한 수 있나 생각이 들면 그냥 돈 모으며 재밌게 살다 가면 됩니다. 새삼스럽게 깨달음 공부에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정말 이것은 아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세상 버릴 때 뼈저린 후회만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만 깨달음 공부하는 겁니다. 아무나 깨달음 공부하는 거 아닙니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면 이것이 뭘까 살펴보세요.우울하다 느껴지면 누가 우울한가 생각해 보세요.불만족스럽고 짜증 날 때 그것의 출처가 어디인가 지켜보세요.걱정거리가 생길 때 이것이 정말 필요한 일일까 의심해 보세요.두려움이 일어날 때 그런 생각을 하는 그놈은 누군가 들여다보세요.자존심이 상처를 받았을 때 누가 상처를 입었나 유심히 살피세요. 하나 같이 그 일들은 흘러가는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런 것들과는 관계없이 그것들을 지켜보는 무엇인가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켜보는 그놈은 외롭지도, 우울하지도, 짜증 나지도 않는, 단지 구경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놈은 누구입니까?
기분 나쁜 꿈, 뒤숭숭한 꿈에 마음을 두지 마세요. 꿈의 99%는 마음의 갈등과 욕구를 淨化(카타르시스)시키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룻밤 5회 정도 꿈을 꿉니다.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꿈을 통해 마음의 기능을 회복시킵니다. 그래서 잠을 자지 못하면(꿈을 꾸지 못하면) 정신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꿈에 마음을 두지 말고 꿈을 연출하는 그놈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가지세요. 인생 전체는 꿈이며, 꿈을 연출하고 감상하는 그놈만 실재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최선(最善)의 일은 깨달음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것은 돈과 명예, 권력보다 우선한다. 꿈속에 살고 있는데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깨달음은 믿음과 구원에 우선(優先)한다. 신자(信者)들은 불안하다. 믿음과 구원은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은 전적으로 나 개인의 일이다. 누구도 거기에 개입할 수 없다. 자기를 알고 나면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아가 죄(罪)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무엇에도 거리낌이 없이 재밌는 구경거리 속에 파묻혀 여유작작하게 살게 된다. 그것이 천국, 극락(天國 極樂)이 아니면 무엇이 낙원(樂園)이란 말인가?
조선 시대 선비들의 다툼은 '理가 우선이냐, 氣가 우선이냐'였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가 먼저냐, 여자가 먼저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자가 없이 여자는 없으며, 여자가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氣가 理를 따르고 있든(理發氣隨), 理가 氣를 타고 있든(氣發理乘),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역시 없기 때문이다. 自覺을 이룰 때 사람들의 공통적 경험은 상당한 에너지(氣)의 체험이다. 그러나 자각도 관리(補任)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희미해지는데, 그것이 氣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에 에너지 없이 작동되는 일은 없다. 깨우침을 얻었던 사람이 다시 우매해져 재관(財官)을 밝히거나, 사교..
외로움, 우울함, 두려움은 무엇이며,그것들의 출처(出處)는 어디인가? 단지 마음작용일 뿐, 한마디로 무지(無知)가 원인이다. 알아채는 순간 그것들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런 것들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란 실재하지 않는 것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생각 태도를 말한다. 무엇이 實在인가? 실재가 존재하는가? 시간, 장소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만을 실재라 한다. 잠시 있었다가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은 실재라 하지 않는다. 그것을 허깨비라 부른다. 그렇다면 世上 모든 것이 비실재 아닌가? 실재는 분명히 존재한다. 실재를 확인한 것을 가리켜 "밝아졌다" 혹은 見性했다고 한다. 仙道는 實存主義다.
깨닫기 전에는 몸과 마음을 조복(調伏) 받을 수 없습니다. 각자 자기들이 主人이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알려드렸듯,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에서 견성(見性)은 시작됩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압니다. 주인 없는 밭엔 잡초가 장대처럼 자랍니다. 몸과 마음은 밭과 같습니다. 밭이 주인 노릇을 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깨닫기 전에는 결코 몸과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평생 돈과 권력의 하인(下人)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서 主人 자리를 되찾으십시오. 그래야 짐승처럼 끄달리며 사는 삶을 종결시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