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 (320)
谷神不死
윤회(輪廻)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한다는 사람이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열반(涅槃)이다. 열반에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 두 가지가 있는데, 전자는 이 세상에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걱정 없이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고, 후자는 실제로 죽어 흔적 없이 존재계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 수행자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혹시 수행에 성공을 거두면(有餘涅槃), 해탈을 얻어 대자유 가운데 세상을 활개 치며 살 것이고,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걱정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죽어 흙이 되고 나면 그대로 윤회에서 벗어난다(無餘涅槃)는 소식을 알리고 싶다. 혹시 불행하게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뇌 속의 메모리가 완전히 삭제되어 윤회를 한다고 해도 엄밀히 그것은 윤회가 아닌 새판이기 때문이다. 금고 속에 백억이 들어있다..
깨달음이란 별것이 아니다. 스스로 깨달았음을 알아챈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인정을 받을 필요 없이, 스스로 깨달아 깨달음에 대한 일점(一點)의 의심도 사라져 편안한 자리에 들면 깨달음이다. 누구나 이미 깨달아 있다. 그래서 부처는 두 종류의 부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스스로 부처임을 아는 부처요, 다른 하나는 부처임에도 불구하고 부처임을 모르고 사는 부처이다. 세상은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기에, 깨달음을 찾기가 그리도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마치 숨쉬며 살고 있는 사람이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중생은 왜 미혹의 고통 속에 살아가는가? 집착(執着) 때문이다. 자기(自己)라는(我相)... 내 몸과 내 마음이 나라는(人相)... 나..
중생(衆生)은 현재에 살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로 만든 '가상(假想)'의 세계 속에서 시간과 공간, 소유의 고통 속에 산다. 실상(實相)의 세계로 회귀(回歸)하는, 즉 도피안(到彼岸; paragate)을 위해서는 得 Anuttara-samyak-sambodhi,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최고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현재'라는 바늘구멍이며, 그것을 통과하기 위해선 깊지도 앝지도 않은 특별한 삼매(samadhi)가 필요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 더 이상 내려 놓을 것이 없는 경지이다. 그 자리는 오직 현재를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시간과 공간, 소유가 끊어진 자리, 中道의 자리에 들어갈 때 비로소 도피안(到彼岸)이 이루어 진다. 中道는 무중력의 자리다. 로켓을 대기권 밖으로 밀어올리기..
깨닫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동기가 있다. 첫번째 동기는 '삶의 어려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나는 고(苦)와 지멸(止滅)에 대해서만 말한다"고 선언했다.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그가 그랬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은 근본적 괴로움이다. 게다가 삶의 난관까지 닥친다면 엎친데 덮치는 격이다. 그러나 삶의 어려움 해결은 깨달음의 동기로서는 'B급'이다. 왜냐하면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것이 그 뒤를 잇게 마련이며, 그것들이 해결되어 편안해지게 되면 공부의 동력을 잃어 다시 미망(迷妄) 속으로 환원(還元)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A급의 깨달음 동기라면 당연히 '자기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궁..
해탈과 열반은 결론부터 말하면 다른 말이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혼용되고 있지만 말이다. 해탈(解脫)은 어원이 산스크리트어 'moksha'이며, 그것은 '삶에 닥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대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어떤 일도 고통이 되지 못한다. 그 모든 것들이 단지 신의 장난(릴라; lila), 헛것(幻)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 마쳤기 때문이다. 열반(涅槃; nirvana)은 시타르타(佛敎)의 새로운 개념이다. 그것을 단지 번뇌가 모두 사라진 상태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기엔 미흡하다. 그것은 소생이 불가능하게 된 생명의 완전한 소멸이다. 거기에 윤회(輪廻)는 붙을 여지가 없으며, 힌두의 해탈과는 개념부터 다르다. 초기불교는 혹 깨달음이 있었다 할지라도 초장(수다원, 사다함)의 ..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 어떻게 세상에 오게 되었고, 결국은 어디로 가고 마는지 모르는 사람, 사실 확인은 포기한 채 오래 믿어왔고 많은 사람이 따르고 있다해서 무조건 따라 믿으려 애쓰는 사람, 그리고... 목숨이 아까워 순종하는 척 하는 이해에 밝은 사람, 만약 당신이 하느님이라면 그런 사람들로부터 숭배(崇拜)를 받고 싶을까? 하느님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자기가 누군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타인의 말과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체험과 확신을 통해 알고 있으며, 당장 목숨을 내어 놓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런 사람의 존경(尊敬)을 받고 싶지 않을까? 당신이 그렇다면 하느님도 그렇다. 세상에 가장 존귀한 것은 당신 자신이다. 당신이 없으면 상대도 없고, 세상도 없고..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일하는 것도, 돈 버는 것도, 권세나 명예를 구하는 것도, 사랑받고 싶은 것도, 자식을 낳는 것도.... 생각해보라. 인간이 하는 행위 하나하나는 빠짐없이 자기를 위해서일 뿐이다. 이웃(원수)을 사랑하라고? 남에게 자비(보시)를 베풀라고? 법(계율)을 지키라고? 인욕(忍辱) 하라고? 예의를 지키라고? 하느님은 한 분만 섬기라고? 살인, 도적질, 거짓말하지 말라고? 부처, 예수를 믿으라고? 국가에 충성하라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그 모든 것이 빠짐없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그것에 무슨 의미를 붙인다 할지라도 자기기만일 뿐이다. 사회 봉사도 좋고, 노벨 평화상도 좋다. 그것들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가 없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밝음(見性)을 얻고 난 후의 반응은 사람별로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어떤 이는 하늘 땅이 뒤바뀌었다 하고, 어떤 이는 이치(理致)가 술술 풀려진다 하고, 어떤 이는 그저 기쁘고 감사함이 그치지 않는다 하고, 어떤 이는 신통(神通)을 부리게 되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세상을 혐오(嫌惡)하며 살게 되었으며, 어떤 이는 '겨우 이것이 見性이란 말인가!'하고 크게 실망하여 평생을 무미(無味)하게 산다. 그 자리(本處)는 한계를 지을 수 없다. 오지도, 가지도, 善하지도, 惡하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으며, 텅 비어 있어 무엇이든 한없이 담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가득 차 있어 무엇이든 그 안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어서 見性하세요. 그 이후엔 마음이 어느 쪽을 향하고, 어떻게 굴려주느..
깨달음은.. 삶이 즐거운 사람에게, 이 정도면 살만한 사람, 삶이 허무한 사람, 삶이 그저 그런 사람, 삶이 지루한 사람, 죽지 못해 산다는 사람, 그리고 삶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오지 않는다. 깨달음은 진정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오게 되어있다. 깨닫고자 한다면, 왜 나는 깨어나야 하는가... 진정 나는 이 삶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나?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무엇도 포기할 수 있나를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나머지 生은 거기서 나온 답에 따라 살아가라.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
오후점수(悟後漸修) 시타르타는 왜 유여열반(有餘涅槃)을 언급했을까?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마음(ego)과 몸은 단번에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닦을 필요가 없는 해맑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돈오돈수(頓悟頓修)가 맞다. 무위법(無爲法)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기대어 살고 있는 마음과 몸은, 신수대사(神秀大師) 말대로 게으르지 말고 먼지털고 닦아내어 때가 끼지 않도록 해야한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부패했던 정부가 단번에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잘라낼 것 잘라내고, 그들의 내면(內面)에 새로운 상(像)을 심어줘야 한다. 오후(悟後)에 영지(靈知)는 에고를 설득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득명(得命), 즉 찌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