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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깨우침을 얻은 사람은 첫째, 쓸데없는 망상으로 자신과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괜한 망상을 짓지 않으며, 남의 망상에도 흔들리지 읺는다. 둘째, 오는 것 막지 않고 가는 것 잡지 않는다. 즐거운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단지 받아들일 뿐, 그것들에 집착치 않는다. 셋째, 세상사 모두는 나를 위해 존재하므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것에 보답하는 일인지 늘 잊지 않는다. 하늘 땅 이치를 모두 꿰었다 할지라도 이 세가지의 향기가 그에게서 풍기지 않는다면 단지 지해(知解)의 종도(宗徒)요, 진정한 깨달음의 제자는 아니다.
한국어에서 단순히 '안다'로 말해지는 것에 대해 영어권 사람들은 know, see, get, have, understand, realization, cognition 등등 그 표현이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 know와 see의 차이는 하늘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하늘과 땅은 붙어 있어 사실상 구별이 모호하지만 그 둘을 하나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보통 'I know'와 'I see'를 두리뭉실 혼용하지만 따져보면 그 차이가 천지보다 더 큼을 알게 된다. 같은 "안다"는 말이지만, know는 속세(俗世)의 표현법이고 see는 출세간(出世間), 즉 깨달음의 언어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볼(see)때 단순히 보지(just look) 않고 기존의 지식으로 여과하여 저장한다. 즉시 과거형으로 바뀌는 속도가 ..
마음 역시 氣인 까닭은? 마음은 생각, 감정(感情), 의지(意志), 그리고 지적활동의 주체(主體)이다. 마음은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되지만 자성(自性)을 갖고 있지 못하며 실제로 그것들(受,想,行,識)을 주재(主宰)하지 못할 뿐더러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 그것들 역시 자주적(自主的)이지 못하며 단지 연기작용(緣起作用)에 의해 일어나고 꺼질 뿐이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가 필요하며 마음 역시 氣가 받쳐주지 않으면 만유(萬有)의 바탕이 될 수 없다. 또한 그것들 역시 에너지(氣)가 없이는 활동불능(活動不能)이다. 氣가 있어 마음이 존재(存在)하고 일체(一切)의 마음작용 역시 氣로 인해 작동(作動)된다면 "마음 역시 氣(心即氣)"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소주천(小周天)은 우주(宇宙)를 한바퀴 돈다는 말이며, 보통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로 비유하는 데서 연유하였다. 소주천은 통관(通關)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앞서의 수련이 동적(動的)인 의념과 인위적인 호흡법에 의존한다면 여기서 소주천은 단순히 정적(靜的)인 의념(神行卽氣行)의 힘이라는 차이가 있다. 독맥(督脈)과 임맥(任脈)은 전체 맥(脈)을 총괄하는 중심 맥(脈)이다. 그러므로 두 맥에 뇌(腦)는 물론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조절하는 기맥(氣脈)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중심 두 맥을 관통시켜 기(氣)가 충실케 되면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능력이 생긴다. 소주천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단순히 몸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데도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루고 나면 정기..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는 한, 에고는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과 마음이 있는 한, 탐냄, 성냄, 어리석음 역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에고를 버리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역사상 살아있는 어느 누구도 에고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에고는 애쓴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애쓰는 그것이 바로 에고이니 말입니다. 본성(本性)을 깨우쳤다면 그냥 두어도 에고는 저절로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저 조용히 있도록 그대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자연무위(自然無爲)라고 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에고와 다투지 않습니다. 그는 에고를 이해하고 설득하고 알아서 순복(順伏)하게 만듭니다. 에고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고, 스스로 맡은 직..
깨달음을 체험하면 에고가 사라지는가? 의외라 생각할지 몰라도 그것은 깨달음의 여정에 있는 사람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깨달음이란 단지 자아가 본성을 알아챈 것에 불과하므로 견성을 했다 할지라도 기존의 개체성이나 경향에는 변함이 없다. 견성을 하는 순간 우리는 에고가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깨달음이란 전체성과의 합일이므로 에고가 잠시 뒤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의식의 주도권은 분명 본성으로 넘어가지만, 다시 생각의 세계로 돌아오는 순간 에고가 다시 전면으로 복귀한다. 세계가 하나라는 것이 진실이긴 하지만, 물질적 사실세계에서는 자아(自我)가 주인이며, 그때 너와 나, 주체와 객체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더러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자신의 상태에 의심이 생겨 의기소침해진다. 그 이..
몸과 마음은 하나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마음도 불편하기 마련이며, 마음이 불안한 가운데 몸만 편안할 수는 없다. 마음이 파악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며, 몸 전체의 에너지(氣) 운행이 원활해져 생명력이 신장된 것을 득명(得命)이라 한다. 득명이란 진짜 생명을 얻었다는 말이며 그리되면 늘 상쾌한 컨티션이 유지되며 노화가 눈에 띄게 느려진다. 득명이란 말이 낯선 이유는 오랜 세월 마음 중심의 행법이 중요시된 나머지 몸(에너지)수련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왔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오직 마음뿐이고 육체는 불결한 것이므로 하루 빨리 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가르침까지 있다. 그들은 마음만을 실재(實在)라 믿고(一切唯心造), 몸은 가상(假像)의 것으로 제거 대상이라 생각해 왔다. 필자로선 썩 이해가 안되는 주장이다..
성공(性功)을 마음을 닦는 공부라 한다면 명공(命功)은 몸을 다스리는 공부이다. 성공의 목표가 사람이 갖추고 있는 불변의 본질을 닦아서 밝은 지혜, 즉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 한다면 명공은 생명 활동의 제1원을 찾아 그것을 키우고 다스려 깨우침을 완성하는 것이 최종의 목표이다. 성명(性命)의 일반적 오류에 대하여 세 가지로 정리해 보도록 한다. 첫째, 정신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보는 사상이 만연되어 있다. 동양사상은 그 둘을 근원적으로 하나(不二)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과 명을 처음부터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도식(仙道式) 사고방식은 아니다. 둘째, 앞에서처럼 육체와 정신의 훈련이라면 심신쌍수(心身双修)라 할법한데 각기 선천적(先天的) 원인(原因)이 되는 성명(性命)이라는 납득키 어려운 말..
앞서 기술했듯이 성(性)과 명(命), 그 둘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 속에 있다. 성은 그것의 유지를 위해 명에 의존하고 있으며, 명은 성이 함께 할 때만 존재한다. '성'이란 선천적 마음, 즉 사람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변의 본질이며, '명'이란 생명 활동의 제1 원인으로서 사람이 살기 위한 바탕이 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도(仙道)에서 남다르게 강조하는 것이 성명쌍수(性命双修)이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가 서로 보완하는 생명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수행자는 그 둘은 동시에 닦아야 한다. 이 양자 중 어느 쪽이건 미흡하면 나머지 한쪽도 제 기능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명을 하나로 보고 수련한다. 성명쌍수란 성명(性命)을 하나로 보고 수련을 지어가는 것이다. 어느 한쪽만을 중시하고 나머..
신선(神仙)이란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공유한, 즉 선계(仙界)와 욕계(欲界)를 공유하는 존재이다. 그는 깨우침을 통해 신성(解脫)을 얻었지만 인성, 즉 오온(五蘊)과 칠정(七情)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온: 色受想行識(몸, 느낌, 생각, 의지, 식별력) *칠정: 喜怒哀樂愛惡欲(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기대심) 그는 Nibbana(涅槃)와 현상계(現象界) 양쪽을 자유롭게 오가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즐기며, 고통 속에 있는 인류에게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다. *열반(涅槃): 해탈 즉 오온(五蘊)과 칠정(七情)을 포기함. *상락아정: 불멸(常)을 득했고, 고통이 없는(樂) 존재감(我)을 지녔으며, 세상의 때(카르마)로부터 자유롭다(淨)는 뜻. 불교수행자들이 고수하는 깨달음의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