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 (320)
谷神不死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누가 '나'를 세상에 나타나게 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었는지,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단지 누구에게서 들었든지 이것저것을 두드려 맞춰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부처는 無我를 말했다. 만유(萬有)는 무상(無常)하므로 '나'라고 할만한 고정된 실체는 없단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 뿐(一切皆苦)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그 당체(當體)는 무엇인가? 지금 여기에 '그놈'이 분명하게 있다. '그놈'이 없으면 내가 누군지 모르는 놈도 역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놈은 '만물은 항상 변한다(無常)'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고 살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고 산다. 그놈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지 나는 모른다. 숨이..
사회성이란 무엇인가? 복잡하게 생각지 말자. 단순하게 말해 그것은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석가, 공자를 막론하고 공통은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줘라"였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 해서 그것을 황금률(黃金律)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에도 자주 문제가 생긴다. 내가 원하는 것이 꼭 남들도 원하는 것일 수 없으며,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들도 따라서 싫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와 남이 존재하는 한 갈등은 영원히 존재한다. 거기엔 善惡이 따로 없으며, 사랑과 자비는 단지 말일 뿐이다. 내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순간, 천사는 악마로 변한다. 깨달음이란 내가 있기 때문에 남도 있으며, 남이 없으면 나 역시 존..
알고 보면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느낌으로 아는 것, 알음알이와 경험 모두가 깨달음으로 통하는 門이다. 사람은 각기 다른 性向을 가지고 있어서 각자 쉽게 통하는 行法이 있다. 觀想 기도, 요가 명상, 탄트라, 위빠사나, 默照禪, 看話禪, 念佛, 丹田呼吸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깨달음으로 가는 方便이다. "이것"만이라고 고집만 부리지 않는다면 道를 이루기는 어렵지 않다는 의미이다. 사실상 行住坐臥語默動靜 모두가 깨달음의 기회가 된다.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이다. 깨우침을 얻고 나면 見聞覺知 하나하나가 깨달음을 알리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 모두가 깨달음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계합(契合)은 마치 볼트와 너트가 들어 맞듯, 本來面目 그 자리에 들어앉는 것입니다. 성령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一心만 있으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 모든 에너지는 애씀이 없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너지를 깎아내리는 오류를 범하지는 마십시오. 세상만사 에너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계합 역시도 에너지가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마치 전기가 연결되면 화면이 살아나고 선풍기가 돌아가듯 모든 일은 에너지의 작용입니다. 에너지가 없으면 본성(本性) 자리를 볼 수 없으며, 그 자리에 들어앉을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仙道에서 氣를 강조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에너지가 없..
"이 정도면 나도 깨달을 만 하지"라고 말하지 말라. 스승이 누구냐, 몇 년을 수행자로 살았느냐, 어디 어디를 다녀왔고, 선방(禪房)에서 몇 철을 났느냐는 중요치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자기 자신이다. 결과로 말해야 한다. 지나간 일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진정 生死를 벗어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道를 위해 그 무엇도 희생할 각오가 정말 되어 있는지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라. 솔직해져야 한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를 누구보다 자기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꿈 같은 세상이라고 백만 번 외쳐도 아무 소용없다. 무엇으로 인해서든지 지금 고통받고 있다면 변명의 여지 없이 꿈에 젖어 사는 것이다. 수행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깨우치지 못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
그것은 만나기 어렵다. 그 이유는 "나"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듯, 나는 그것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것은 말과 글로 설명하기 어렵고 나누어 줄 수도 없지만,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깨닫겠다는 미음만 있다면 말이다.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을 얻은 사람은 그런 일이 있어도 절대 개의치 않는다. 밑도 끝도 없이 '회개하라'느니, '천국이 가까이 왔다', '너 자신을 알라'느니거경궁리(居敬窮理), 고함을 치고, 몽둥이찜질을 하고, 도저히 생각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話頭)를 내놓는 이유...오매일여(寤寐一如), '쉬지 말고 기도하라', '에고'를 버리라는 말도 안 되는 지시... 그도 안되면 세상을 버리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80년대 히트했던 대중가요의 노래 가사다. 요즘 "갑질"이란 말로 떠들썩하다. 왜 그만하면 베풀며 살만한 사람들이 갑질을 할까? 자기만족이 없어서가 아닐까? 돈과 권력이면 다 될듯해도 만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원래 만족이 없다. 친구는 10억을 모으는 것이 목표라 했다. 그러나 그 후 10억은 돈도 아니라 한다.이번 승진시험만 합격하면 願이 없다던 친구가 理事까지 지내고는 지금은 오히려 어깨가 더 처져있다. 누구는 세 번의 최고권력도 부족해서 영구집권하려다 부하의 총에 죽었고, 누구는 고위관직으로도 만족이 없어 갑부가 되려고 국고에 손을 대다가 지금은 감옥살이 중이다. 인간의 욕망은 왜 끝이 없을까? 主人 자리를 생각에 빼앗겨서 ..
우리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 마치 스크린처럼 비어있는 마음(眞如)과, 스크린에 비친 영상처럼 시시때때로 변하는 마음 말이다. 스크린(眞如)은 어떤 영상이 비치든 가리지 않고 수용하지만,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 풍경이 아름답다고 아름다워지지 않으며 폭탄이 떨어져도 흠집 하나 남지 않는다. 본래의 마음(眞我)은 울고 웃어도 그뿐이고, 죽이고, 살리고,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아무런 변함이 없다. 그 마음(眞如)을 알아챈 사람을 가리켜 세상 위에 있는 사람, 깨우친 사람이라 한다. 좋은 일이 있건, 슬픈 일이 있건, 비가 오건, 바람이 불건, 끄달리지 않고 如如한 이유는 사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옷과 내 집이 내가 아니듯이, 내 몸과 내 마음은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내 몸과 내 마음은 과연 내 것이 맞나?모두가 얻어온 것, 구걸한 것, 갈취해 온 것, 그리고 빌려온 것들이 아니던가? 그럼 진짜 "나"와 "내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아닌 것,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모두 제하여 보라. 그리하고 나면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이 진짜 "나"이며, "내 것"이다. 그것을 알아채기만 하면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고 유유히 살게 된다. 어떤 달콤한 속삭임, 무슨 공갈 협박에도 속지 않는다. 어떤 가르침, 어떤 교리(敎理)도 뛰어넘어 진정한 믿음, 소망, 사랑으로 한가하게 살게 된다. 그런 사람이 비로 바로 깨달은 자요, 성령을 입은 자요, 부처다.
道를 닦는 사람에겐 세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첫째는 자신(自信), 즉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요, 둘째는 함께 道의 길을 가는 사람, 즉 도반(道伴)이며, 셋째는 길 안내자, 즉 스승이다. 自信 자신을 믿어라. 나는 이미 깨달아 있다. 세상의 부정적 속삭임에 속지 말라. 공부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면 聖人의 말이라 할지라도 쓰레기처럼 생각해라. 지금 당장 깨어나라. 견성은 어렵지 않다. 어떻게 자기를 아는 일이 그리도 복잡해야 하고, 장구(長久)한 세월이 필요하단 말인가? 道伴 친구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걷는 길은 천 리도 한순간이다. 道伴은 친구를 넘어서 있다. 그의 눈은 언제나 저 높은 곳, 언덕 저편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승 道 닦기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꼭 길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