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3. 깨달음 (Enlightenment) (81)
谷神不死
마음이란, 있는 그대로 완벽한 것이어서 따로 손을 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생겨난 적이 없어서, 사라질 수가 없고,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못하고, 때가 묻을 수 없어 당연히 닦아서 깨끗하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굳이 말하자니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은 닦고 말고 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오직 무위(無爲; 일없음) 밖에는 할 말이 없지만, 중생(衆生)이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니, 부득이 호흡을 보라느니, 정좌, 몰입하라느니, 지관, 참선하라느니 하는 방편을 내놓게 된 것이다. 그러한 수행법들은 하나같이 물질, 즉 몸하고만 연관을 가질 뿐, 마음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상호 관계가 없지 않으므로, 혹시 간접적인 효과라도 있을까 하..
지식은 책이나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깨달음은 스승을 직접 만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다. 평생을 교육받아온 것이 깨달음과는 너무나 멀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스승과 눈을 맞추고, 그의 氣를 받으며, 납득이 될 때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는 당신으로부터 어떠한 물질적 대가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가 사는 이유는 오직 당신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를 찾은 당신은 福이 많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 함께 사는 사람 가운데 깨우친 스승과 마주 앉을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는 당신의 심중(心中)을 꿰뚫어 본다. 그의 앞에선 옷깃을 여미고, 오직 깨달음에 대해서만 묻고 답하라. 언제 또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른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란 말이 ..
바른 견해를 가리켜 정견(正見)이라 합니다. 그 자리를 확보하고 나면, 그다음 팔정도(八正道)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본래면목'을 본 것이 바로 정견입니다. 이른바, 무위자연(無爲自然)입니다. 정견을 얻은 사람은 당연히 '정사유(正思惟)'를 하게 됩니다. 치우치지 않는 말(正語)을 하게 되고, 바른 행동(正業), 바른 직업(正命)을 갖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바른 수행(正精進)을 하게 됩니다. 이어서 바른 알아차림(正念)을 하고, 바람직한 삼매(正定)를 즐깁니다. 복잡할 것 없습니다. 선도 생각지 말고(不思善), 악도 생각지 않으면(不思惡), 바로 정견 자리로 인도합니다. 정견(正見)만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시작이며 마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꿈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사는 것이 허망(虛妄)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꿈을 바꿔 꿀 수 있어야 하고, 실(實)답게도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의 가르침을 따라 인류를 멸망시키고 말아야 하겠습니까? 어서 관념(觀念)의 늪에서 나오세요. '허무(虛無)의 꿈'에서 깨어나십시오. 꿈같고 허망한 세상을 바꿔 살지 못하면 깨달음은 얻어서 무엇한답니까? 다음번엔 이슬처럼 사라지는 꿈을 다시 꾸게 될 텐데 말입니다. 虛無에 빠지고 비관에 허덕이다가 자살한 일본의 '무묘앙에오'처럼 살아야 하겠습니까? 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중생들에게 희망을 줄 수는 없을까요? 자성(自性)을 깨우친다는 것이 진정 아무것도..
경전(經典)이나 어록(語錄)을 읽고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겠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럴 때는 스승을 찾아야 합니다. 스승은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빨갛게 물든 가을 산이 스승이 될 수 있고, 요란하게 소리 내며 나는 기러기 떼, 주방의 은은한 된장찌개 냄새, 창문을 열었을 때 밀려드는 시원한 바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 제일은 지금 나와 대화가 가능한 살아있는 스승입니다. 그의 앞에 조용히 앉아 가르침을 구하십시오. 끝장을 낸다는 마음으로 묻고 또 물으십시오. 그가 귀찮아할 거라는 생각은 접으십시오. 지금 당신은 그의 형편을 생각할 처지가 아닙니다. 100일 기도 대신에 스승을 백일 만난다는 각오로 임하고, 그리하고도 별 성과를 못 얻으면 야멸차지만 다른 스승을 만나십시오. 임제(林悌)도..
서울 사는 사람이라 해서 모두 남산 팔각정에 가본 것은 아니며, 대장간 집 식구라 해서 모두 호미나 괭이를 잘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개 본 적 있습니까? 종일 화두(話頭)를 들고 앉아 있다고... 오래오래 삼매(Samadhi)에 들어 있다고만 해서 꼭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깨닫겠다는 확실한 의지(意志)와 코드가 맞는 스승, 그리고 시절 인연(時節因緣)이 도래해야 깨닫는 법입니다. (전도서 9:11) 견처(見處)를 얻고 난 후에도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밀고 당기기를 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애써 얻은 그 자리가 방심하는 사이 유실되어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내 여자였던 선녀(仙女)가 아기 둘을 안고 승천(..
불교(佛敎)에 깨달음이 없고, 기독교에 성령(聖靈)이 없다면, 그것은 속 빈 강정이요, 앙꼬 없는 찐빵이다. 중에게 깨달음에 관해 묻고, 목회자에게 성령을 물었을 때, 반가워서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친절히 대답에 임하면 그는 바른 스님이요, 바람직한 목사님이 분명하지만, 만약 얼굴에 당황함이나 불쾌함을 나타내거나, 귀찮아하며 바쁘다는 핑계로 피하려 한다면, 그는 돌중에 땡초요, 먹사에 삯꾼이다. 불교의 '불(佛)' 자는 깨달을 佛이요, 성령이 안 계시는 교회는 마귀 소굴이기 때문이다. 깨달음과 성령은 한통속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 어딘가로부터 강림(降臨)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텅 비워 심령(心靈)을 가난하게만 해주면 저절로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이야기하자면 무사도(武士道)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엔 무사도가 거의 퇴색되어 버렸다고 많은 이가 슬퍼합니다. 그것이 일본 정치계가 당면한 자학적 태도의 원인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세계의 흐름에 역행(逆行)하는 근시안적인 정치형태 말입니다. 무사도는 불교와 도가(道家) 그리고 공맹(孔孟)을 기초로 한, 의(義), 용(勇), 인(仁), 예(禮), 성(誠), 명예(名譽), 충의(忠義)라는 7가지 덕목을 숭상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저변에는 깨달음에 대한 비장함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사무라이 정신, "나는 다다미 위에서 죽지 않겠다. 나는 바람 부는 벌판에서 나보다 한 수 높은 사람의 칼에 맞아 죽겠다"라는 태도.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 첫째, 현재에 안주하지 않겠다 - 둘..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는 것(見聞覺知)이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없이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과 같기 때문입니다. 단, 볼 때는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느낄 때는 느끼기만 하고, 알 때는 단지 '그러하구나!'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대로 깨달음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해석 없이 단지 '그러하구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기존의 정보를 끌어내 그것에 덧입혀 사용하며, 그 순간 그것은 본질에서 어긋나 버립니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하고 수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번뇌와 망상(妄想) 속에서 살아 온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깨달음의 가치가 너무 과대 포장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물론 깨닫고 나면 몸(깨달음은 건강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람도 많다)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누구나 체험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전혀 개인적이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바로 완성형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다. 그때부터 더 높고 깊은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공부의 끝이라면, 왜 석가는 깨달음의 최고 단계(아라한)에 올랐다는 제자에게 숲속에 평생 머물며 자기를 닦는 일로 소일하라 하였으며, 선불교(禪佛敎)의 제자들은 왜 깨달음을 얻고도 몇십 년간을 움직이지 않고 스승 밑에 머물렀던가? 성인(聖人)이라는 사람들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