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3. 깨달음 (Enlightenment) (81)
谷神不死
깨달음은 수행의 결과물이 아니다. 먼저 깨닫고(頓悟), 그 후에 수행을 진행(漸修)하는 것이 맞다. 깨달음이 없는 수행은 헤매기만 할 뿐 결국은 허탈만을 남긴다. 그것은 마치 종착역이 없는 서울의 지하철 2호선과 같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나를 떠난 적이 없다. 그것은 마치 책상 서랍을 열기만 하면 보이는 예금 통장과 같다. 그저 서랍을 열기만 하면 된다.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깨닫고 나서 해야 하는 공부는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을 숨 쉬게 만드는 수련, 깨달음을 활성화하는 수련이다. 전철에서 내려 최종 목적지를 향해 가는 수련이다. 책상 속 통장을 꺼내 현금화하는 수련이다. 평생 허깨비로 만족하며 살 것인가?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알고 가..
氣는 감각할 수 없고, 볼 수 없다는 것이 定說이었지만, 이제는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곧 의지만 있으면 뇌파(腦波)를 바꾸는 것이 일반적인 세상이 됩니다. 뇌파는 의식적으로는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쉬운 일입니다. 머릿속 생각만 정리하면 뇌파는 낮아져 마치 잠잘 때의 뇌파(알파파)가 형성됩니다. 거기서 한 단계만 더 내려가면 깨달음과 만나는 腦波帶(세타파)가 있습니다. 알파, 세타 뇌파대 만들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몸에 힘을 빼고 생각만 정리하면(無念無想) 저절로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언제든 확인이 가능한 일입니다.
利己的인 사람이 되십시오. 깨달음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오죽하면 처자식 버리고 혼자 山으로 가겠습니까? 깨달음은 자기 문제의 해결책일 뿐, 타인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원래 이기적입니다. 이타행(利他行)이 그럴듯해 보여도, 알고 보면 利己心의 뿌리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위선(僞善)을 버리십시오.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말과 행동이 결국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고 나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이웃 사랑 그런 것들은 제자리에 그대로 두십시오. 솔직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聖靈)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일단 깨달음이 먼저입니다.
깨달음이란 꿈을 깨고 나니 꿈속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이 헛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챈 것입니다. 살아보니 70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꿈속처럼 도무지 가늠이 안 됩니다. 놓치고 싶지 않아도 우리의 알음알이나 소유물들은 오래지 않아 나를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오지도 가지도 않는 自明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것을 깨우친 것을 가리켜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詩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좋은 결말을 보려면 그 시작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농부는 가을부터 내년 농사를 생각하고, 튼튼한 건물을 지으려는 건축가는 기초공사부터 든든히 합니다. 수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八正道의 첫 번째는 '正見'입니다. 하지만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초발심자에게서 바른 견해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견해는 아직 俗世의 시각(視覺)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식(正式)으로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최소한 1년 정도 行者로서 힘들게 나무하고, 빨래하는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동안 선배들 밑에서 과거의 가치관들을 정리하고, 수행에 입각한..
"당신도 깨달아 있다"라는 말을 늘 듣고 살아도 자신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깨닫고 나면 무언가 대단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자기가 누군지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들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見性이라고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일 뿐입니다. 이 몸을 "나"라고 할 수 없고, 이 마음이 내가 아니며, 나에게 부여된 어떠한 수식어도 "나"일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몸 안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나를 솔직하게 보고, 들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더 쉽다"고 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마치 불꽃처럼, 바람처럼..
이렇게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 할 때 이혼하는 겁니다. 도저히 이 나라에선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 이민 가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살다 가서는 후회만 남을 거라는 마음이 생길 때 깨달음 공부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대로 사는 맛이 있고, 이혼해봐야 별것 아니란 생각이면 다소 불만스러워도 섬기며 사는 겁니다.그래도 내 나라가 타국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면 이민을 포기하는 겁니다. 미음 고생, 몸 고생이 심하다 해도 별 뾰족한 수 있나 생각이 들면 그냥 돈 모으며 재밌게 살다 가면 됩니다. 새삼스럽게 깨달음 공부에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정말 이것은 아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세상 버릴 때 뼈저린 후회만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만 깨달음 공부하는 겁니다. 아무나 깨달음 공부하는 거 아닙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최선(最善)의 일은 깨달음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것은 돈과 명예, 권력보다 우선한다. 꿈속에 살고 있는데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깨달음은 믿음과 구원에 우선(優先)한다. 신자(信者)들은 불안하다. 믿음과 구원은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은 전적으로 나 개인의 일이다. 누구도 거기에 개입할 수 없다. 자기를 알고 나면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아가 죄(罪)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무엇에도 거리낌이 없이 재밌는 구경거리 속에 파묻혀 여유작작하게 살게 된다. 그것이 천국, 극락(天國 極樂)이 아니면 무엇이 낙원(樂園)이란 말인가?
알고 보면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느낌으로 아는 것, 알음알이와 경험 모두가 깨달음으로 통하는 門이다. 사람은 각기 다른 性向을 가지고 있어서 각자 쉽게 통하는 行法이 있다. 觀想 기도, 요가 명상, 탄트라, 위빠사나, 默照禪, 看話禪, 念佛, 丹田呼吸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깨달음으로 가는 方便이다. "이것"만이라고 고집만 부리지 않는다면 道를 이루기는 어렵지 않다는 의미이다. 사실상 行住坐臥語默動靜 모두가 깨달음의 기회가 된다.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이다. 깨우침을 얻고 나면 見聞覺知 하나하나가 깨달음을 알리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 모두가 깨달음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나도 깨달을 만 하지"라고 말하지 말라. 스승이 누구냐, 몇 년을 수행자로 살았느냐, 어디 어디를 다녀왔고, 선방(禪房)에서 몇 철을 났느냐는 중요치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자기 자신이다. 결과로 말해야 한다. 지나간 일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진정 生死를 벗어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道를 위해 그 무엇도 희생할 각오가 정말 되어 있는지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라. 솔직해져야 한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를 누구보다 자기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꿈 같은 세상이라고 백만 번 외쳐도 아무 소용없다. 무엇으로 인해서든지 지금 고통받고 있다면 변명의 여지 없이 꿈에 젖어 사는 것이다. 수행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깨우치지 못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