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3. 깨달음 (Enlightenment) (81)
谷神不死
뚜렷한 목적이나 목적지가 없이 기차를 타는 사람이 많아졌다. 기차를 타기만 했다고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이 목적지를 지나쳐 버리기에 십상이다 많은 선지자(先知者)가 깨어있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마음에 대한 관심이 커져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세계적으로 명상(冥想)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대부분이 마음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명상을 배우는 것은 아닐까? (실제 미국에서는 정신과에서 명상을 추천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명상이 무엇인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설명하는 선생은 거의 없다. 또한 명상의 목적에 대한 설명도 뚜렷하지 않다. 그런 스승 밑에서 명상한답시고 다리 꼬고 앉아 저린 걸 참는다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싯다르타가 제자에게 깨달음을 줄 때 ..
일반적으로 '깨달음'이라 하면,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되는 것, 즉 의문스러웠던 것이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수행자의 깨달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선 생각과 궁리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의 주체(主體)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생각의 주체(自我)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수행자의 깨달음은 물리의 법칙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부터 비롯되는 관계의 문제나 그 어려움에 대한 해답이 아닙니다. 수행자의 주제(主題)는 오직 "나"라는 존재,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대한 것 뿐입니다. 그것을 해결해야 만이 내적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와 안정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인과에 어둡지 않습니다(不昧因果).그러므로 어찌하면 건강해지는지 알며, 어찌하면 병에서 벗어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집니다. 운동은 어떻게 해야 하며, 무슨 음식을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또 마음을 어떻게 조절해야 건강한지에 대해서도 밝습니다. 만약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심혈관질환이나 소화 장애, 소변불리(小便不利), 신경통이나 변비, 불면증, 비만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만은 편하다고 주장해도 몸이 불편하면 마음도 불편해집니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니 말입니다. 카르마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지만 말입니다.
믿음이 위험한 이유는 눈 밖에 있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밖에 있는 것만을 믿고 있는 한, 거기에 평화와 안정은 없습니다. 밖에 있는 것은 변합니다. 그러므로 관심을 안으로 돌려야 합니다. 믿음을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지킬 필요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사실상 그것은 믿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진리(안에 있는 것)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긴 적이 없으므로 사라지지도 않고, 그것은 때가 묻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것을 찾은 것을 "깨달았다", 혹은 "聖靈이 임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찾을 필요도, 얻을 필요도, 임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깨달았다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유튜브(YouTube)를 조금만 살펴보면 이젠 개나 소나 깨닫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들은 깨달음이 모두라고 생각한다. 한 소식 얻은 것으로 이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한가한 道人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무엇을 매개(媒介)로 우리가 살고 있으며, 무엇이 매개되어 그를 깨닫게 했고, 무엇이 그 깨달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가에 대해 그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깨닫고 나서도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갈고닦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에너지, 즉 氣이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알아채는(見聞覺知) 하나하나가 모두 "깨달음" 임을 알게 된다. 창밖의 까치 소리가... 갓 뽑아낸 커피 향, 혀에 감도는 쌉쌀한 맛이...山을 휘감고 도는 안개 무리와 그에 대한 사랑의 확인 하나하나가 깨우침의 자료가 된다. 그렇다고 자기 수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먹고 마시는 것에 심취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무디어지게 마련이고, 나를 다시 악몽(惡夢) 속으로 다시 밀어 넣는다. 기운(氣運)의 수련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청정(淸淨)하게 해주는 묘약(妙藥)이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견인차의 구실을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첫째, 지성인(知性人)을 자처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모른다는 것은 진짜로 말이 안 되는 일이고, 둘째, 깨달음이 있어야 다음 진도(進度)가 나간다. 아니면 짐승처럼 살다 짐승처럼 죽을 수밖에 없다. '므나의 비유'를 아십니까? 누가복음 19:13부터 나오는 - 어떤 귀인이 열 명의 신하에게 각각 은(銀) 한 므나(100 드라크마. 1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씩 나누어 장사하라 주고 여행에서 돌아와 보고하라 한 즉, 한 신하는 그것을 열 배로, 한 신하는 다섯 배로 늘렸다 하였으나, 한 신하는 그것이 소중하다 하여 감추어두고 곱게 보존만 하였더니 열 배와 다섯 배로 늘린 신하는 칭찬을 받았으나 그대로 보존한 신하는 심한 질책과 함께 그것마저 뺏겨 버렸다는 - 이야기. 우리에게는 너 나 할 것 없이 자..
문: 깨달음을 얻으면 運도 바뀝니까? 답: 바뀌는 것은 내면입니다. 깨달음은 불안한 마음, 쓸데없는 근심 걱정을 사라지게 합니다. 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타인과 불화하지 않고 공부나 사업에 능률이 붙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갑자기 없던 재물이 생기거나, 승진이나 사회적 지위의 변동이 생기는 것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소수는 큰 공부터(道場)를 열어 많은 사람을 일깨워 주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지만, 다수의 道人은 평생을 알아주는 사람 없이 빈한(貧寒)하게 살기도 합니다. 그냥 놓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運이란 타고난 것 70, 노력 30으로(運七技三) 시절인연(時節因緣)에 따라 흐르는 것이니 마음 쓰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선 깨달음부터 얻고 말..
삶의 고뇌(苦惱)가 닥쳤을 때, 그것에 쓸려 흘러가지 않고 그것 속에서 무상(無常)을 보고, 그것이 견처(見處)가 된다면 번뇌(煩惱)는 즉 보리(菩提)로 변하는 겁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공부 생각은 나지 않고 더 맛난 것 없을까만 찾는 법입니다. 막다른 길이 다다른 것을 행운(幸運)으로 아십시오. 싯다르타처럼 조작하지 않고도 저절로 감당키 어려운 위기가 닥쳐왔으니 말입니다. '정말 이런 대접을 받고도 사는 게 맞아?'라는 큰 배신감 앞에서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안 태어났다 치고 나를 한번 던져봐?"라는 각오가 힘을 얻을 때, 비로소 언제 숨었냐는 듯 밝게 웃으며 나타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좋은 사주(四柱)를 타고나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착한 자녀 속에서 무난하게 삶을 마치는 것은 불행..
무엇이 보였는지, 무슨 소리가 들렸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것은 곧 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기도 명상으로 오랜 기간을 몸 바쳐 수련해도 깨달음의 길이 멀어지는 이유는, 진실을 따르지 않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보고, 누가 듣느냐이다. 보이고 들릴 때, 즉시 보고 듣는 당체(當體)로 시선(視線)을 옮길 수 있어야 한다(回光反照). 그 자리에 이르면 시공(時空)이 끊어진다. 그것이 바로 깨닫는 비결, 일승법(一乘法)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보는 훈련이 거의 되어있지 않다. 몇십년을 닦아도 도달치 못하는 이유는 습관대로 "그것"을 외부(外部)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