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3. 깨달음 (Enlightenment) (81)
谷神不死

깨달은 사람이 정규직이라면, 무명(無明)의 사람은 임시직에 비유할 수 있다. 깨달음이란 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고, 죽음 역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임시직에 있으면 절반의 임금에 승진 기회도 없이 남들이 기피하는 격무에 시달려야 하고 게다가 언제 해고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규직이 되고 나면, 우선 해고의 불안에서 벗어나며, 합당한 임금에 내가 하고픈 일을 내가 원하는 만큼 할 수 있고, 필요할 때 쉴 수 있는 자유도 보장된다. 임시직에는 의무만 넘칠 뿐, 권리는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왜 그래야만 하는지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보낼 수밖에 없지만 ... 깨닫고 나면 사물의 이치에 밝아지고, 늘 안락한 가운데서 감사할 일만 쉼 없이 일어나는 삶을 살게 된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사람의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깨달은(頓悟) 사람만이 깨달은(頓悟) 사람의 사정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쉽게 설명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은 언어(言語) 너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한다. 굳이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어서 깨달으면 되는 일이고, 또한 모른다해도 세간(世間)살이에는 별 지장이 없으니 말이다. 깨달음이 무르익으면 자신의 깨달음을 말과 글로 풀어내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한다. 언어의 마술사가 된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되는 일이 아니며, 깨달았다 할지라도 소양(素養)이 부족한 사람은 입을 다물거나 계속해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지루한 소리만 할 뿐이다. 일단 돈오(頓悟)..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깨달음이 무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마트에 물건을 사러 갈 때, 최소한 그 물건이 무엇이며 용도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막연하게 맛있는 것, 근사한 것, 황홀한 것이란 생각만으로는 그 물건을 눈앞에 두고도 바구니에 담지 못한다. 그것이 10년을 숨을 지켜보고도... 20년을 만트라(mantra)를 외우고도... 평생을 스승을 모시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다. 경계(境界), 즉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풍경(風景)이 깨달음은 아니다. 깨달음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을 알아채는 그놈, 그리고 그놈이 활동하는 무대 위에 함께 서는 것이다. 영리한 개는 발소리만 듣고도 주인을 알아보고, 인연 있는 사람은 죽비 소리나 풍경 소리, 그리고 교회 종소리 한번에도 그 자리를 알아차린다...

신비주의(神祕主義)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세상이 어지러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종교(宗敎)라 부르지만, 그것은 신앙(信仰)에도 못 미치는 미신(迷信)이다. 신비주의란, 신(神)이나 절대자 등 궁극적 실재(實在)라고 스스로 믿는 것과의 합일(合一)을 추구하는 철학 또는 사상(思想)을 말한다. 우선 말하건대, 깨달음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깨달음이란 외부(外部)의 어떤 것과도 합일하지 않으며, 여기서 실재(實在)란 자성(自性) 자체이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 숨 쉬는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깨달음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외부(外部)의 어떤 힘을 숭상(崇尙)하며, 그것으로부터 어떤 기운(氣運)을 받거나 그것과 합일(合一)되기를 바..

보는 "나", 보이는 대상, 그리고 보는 행위가 하나로 느껴진다면 깨달음이 깊어진 것이다. 보는 "나"가 없이는 대상과 행위가 무의미할 것이고, 보는 행위가 없다면 보는 "나"나 대상이 실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보고 듣는 "나"와 대상은 둘이 아니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깨닫고 나면 상대의 좋은 면, 아름다운 면만 보이는 법이다. 세상은 감사할 일투성이다. 그것이 내가 깨달았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세상 모두는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다. 코 하나만 빠지면 그물 전체가 쓸모없어지듯, 보고 듣고 느끼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깨달음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자리는 모양과 소리가 없습니다. 그 자리는 먼 데 있지 않고, 견문각지(見聞覺知)와 함께 있습니다. 그 자리(本來面目)는 생각을 내려놓은 자리에 나타납니다. 공(空)과 적(寂), 묘유(妙有)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내려놓고 12처(處)의 작용(作用)에만 초점을 맞춰보십시오. 유혐간택(唯嫌揀擇)이면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 했습니다. 그 자리를 깨치고 나서는 그 作用의 뒤에 흐르는 에너지를 살피십시오. 작용은 협업(collaboration)입니다.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 합니다. 그것이 성명쌍수(性命雙修)입니다.

의수단전(意守丹田)과 소주천(小周天)을 통해 신(神), 즉 의식(意識)과 기(氣)는 하나가 되고, 그리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태식(胎息)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때 모든 것은 하나가 됩니다. 胎息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이고,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안목(眼目)은 단전(丹田)이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이 신안(神眼)이 됩니다. 그때 氣는 사랑이 되며, 氣를 알아채는 것이 깨우침이 됩니다. 거기에는 神도 없고, 氣도 더 이상 없어져 모두 하나가 되고(此兩者同) 맙니다. 함부로 깨달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말을 하는 순간 깨달음과 깨달은 자는 둘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자성(自性)을 보는(見) 순간, 그 자리(空寂)와 알아챔(靈知)이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경전(經典)을 끌어다 붙이고, 선지식(善知識)의 노래나 따라부른다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늑대가 어쩌다 호랑이 탈을 쓰고 있다고 하여 호랑이는 아닙니다. 토끼, 멧돼지가 나를 보고 도망간다고 하여 내가 호랑이는 아닙니다. 호랑이들이 나를 호랑이라 해줘야 비로소 호랑이입니다. 누가 나에게 맥없이 깨달았다고 했다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한 점 의심도 없어야 합니다. 내가 깨닫지 못했다면, 석가모니도, 혜능(慧能)도, 임제(臨濟)도 깨닫지 못했다고 당당히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견성(見性)은 성(性)을 본 것(見)입니다. 性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어찌하여 조주(趙州)는 개에는 불성(佛性)이 없다(無) 했나요?

동물 유전체학(생명과학) 박사학위를 줄 때 돌연변이, 즉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명체를 창조해 냈는지로 자격을 검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논문(論文)을 통해 합리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관문(關文)이 하나 더 있겠지요. 깨달았다고 확신하는 학인(學人)이 선지식(善知識)에게 인가(認可)를 청하면, 그는 우선 자신이 공부했고 깨달았던 경계를 가지고 학인(學人)의 깨달음을 가늠합니다. 그때 어떤 이에게는 단번에 시원한 認可가 내려지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선문답(禪問答)이 온종일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고도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최종으로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나 책에서 본 것은 쏙 빼고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이야기로 답을 해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앞니에 털이 세 ..

깨달음(頓悟)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올바로 이해(解悟)하지 못한다면 돼지가 진주를 목에 건 것과 다르지 않다. 돈오(頓悟)와 해오(解悟)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삶에 제대로 적용(證悟)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백만장자가 자기 돈을 토지나 은행에 묻어두고 빈곤하게 사는 것과 같다. 頓悟를 이루고 나서 다시 스승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아직 혼자 힘만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頓悟가 있었다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된다. 경전(經典)들을 가리지 말고 두루 섭렵해야 하고, 선배 수행자들의 충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혼자 잘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은 수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