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3. 깨달음 (Enlightenment) (81)
谷神不死
사람은 누구나 깨달아 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깨달음은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더 쉽다는 말도 있다. 이제는 그런 정도는 누구나 아는 세상이 되었다. 정보 공유화의 시대, 우리는 스마트폰만으로도 원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리켜 개벽(開闢)이라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깨달음의 체험은 꼭 필요하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집을 한 채 사서,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신 것만으로 "이 집은 당연히 내 집이다"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내가 산 집을 남에게 빼앗긴 적이 있다. 등기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내 집임을 분명히 하려면 법원에 가서 과연 이 집이 내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아버지가 "네 집이다"라고 했다고 해서 내 집은 아닐 수..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선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깨달음을 위해선 모든 노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오랜 기간 애를 쓰고도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노력해야 얻어진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여(眞如) 자리는 변함이 없이 언제나 여여하며 어디로 가지도 않습니다. 내려놓고(don't think) 보기만 하면(just look) 바로 드러나는 것이 본래면목입니다. 하지만 명(命)의 자리는 다릅니다. 그것은 수시로 변하며, 관리를 소홀히 하면 엉클어지기에 십상입니다. 원래 우리들은 깨달음 자리는 너무나 당연하며 命을 닦는 과정에서 기(氣)를 잘 닦아 가다 보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명쌍수(性命雙修)가 올바른 수행법입니다. 그 말은 '너무 ..
깨달음은 이해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깨달음은 체험(體驗)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은 틀리지 않는다. 먹어봐야 맛을 알기 때문이다. 체험이 없다면 확신이 없다. 그럴 경우는 단지 남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그럴 거야~" 하는 수밖에 없다. 남이 밥 먹는 거 백날을 쳐다봐도 나는 배부르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깨달음의 체험이 있었지만, 그것이 무언지 모르거나 그것이 바로 자신(眞如)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마치 꿈을 꾼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 천상(天上)에 잠시 다녀온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체험도 필요하고, 깨달음 후 공부를 통한 확실한 이해도 필요하다. 기억이 사라질 정도로 너무나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으므로 자주 집의 곳곳을 살펴봐야 한다. ..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문빗장을 만져 보아라!" '앞으로 스님이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대한 경봉(鏡峰) 스님의 답이었다.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느냐에 대해서 그가 말한 가장 명쾌한 답이 아니었을까? 향기에 취할 때, 맛난 것을 먹을 때, 부드러운 것을 만질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행복해진다. 왜 그럴까? 깨달음의 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chance)이기 때문이다. 혹시 그 순간 당신이 깨어있다면 즉시 본래면목(깨달음)과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돈오(頓悟)라 한다. 깨어있음이란 잡념들에서 벗어나 있는 순수의식이다. 夜半三更 문 빗장을 만질 때 당신은 어떻게 될까? 아무 생각도 없지 않을까?
생각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두려움, 공포 속에 있게 만든다. 생각이 과거나 미래로 움직일 때, 우리의 마음은 수치스러웠다가, 들떴다가, 의기소침했다가, 왔다 갔다 한다. 후회는 과거의 소산이고, 불안과 초조는 마음이 미래로 이동할 때 일어난다. 깨달은 이의 마음이 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마음이 늘 현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불안과 공포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허깨비라는 것을 직시(直視)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이호랑이나 딱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던가? 깨달은 사람은 언제나 실재(reality) 속에 산다. 그러므로 가상(假像)이나 가설(假說)로는 그를 속일 수 없다. 그에게 세상은 유희(遊戱)에 불과하다. ..
'깨달음은 불교(佛敎)에만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말입니다. 석가모니 이전에도 깨달음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석가모니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는 깨달음을 발견한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누구라 할지라도 당신 자체가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음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 사람에게 깨달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가리고 있는 이 생각들을 잠시 쉬게만 하면 즉각 그리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깨닫고 말 것입니다. 깨닫지 않고는 이 어려운 세상에서 이리 끌리고, 저리 쥐어박히고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간단합니다. 내..
깨달은 사람은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가 부처라는 것,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의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부처라는 것,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의심이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분한 마음, 시기, 질투가 없습니다. 탐심이 없고, 성내는 마음이 없으며, 어리석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부처요,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들어 알고는 있어도, 썩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법입니다. 이치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인데, 마음이 부처라는 것(卽心是佛), 우리, 즉 내가 神(요한 10:34. 시편 82:6)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모든 것이 불만스럽습니다. 그에겐 기쁨이 없습니다. 많이 가졌든 갖지 못했든..
깨달음은 꽃이 피어나듯이, 멀리서 종소리가 귀를 울리듯이, 애씀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이른바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문이 열린다. 깨달음을 위해서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대로 깨달음이다. 지금 여기, 시절 인연(時節因緣)을 만나라. 깨달음은 여기 이렇게 늘 있는 것(如如)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고, 텅 비어 있으며, 고요하다. 그것을 위해서는 애씀이 필요치 않다. 진실(眞實)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려고만 한다. 깊은 삼매에 들어야 한다고 하고, 그것이 안 된다며 사회를 떠나고, 쉽게도 무문관(無門關)에 들고, 생각 없이 용맹정진(勇猛精進)에 돌입한다. 그렇게 해야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 믿는다. 애를 쓰는 것은 나무랄 생각은 없다..
팔정도(八正道)는 정견(正見)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사실상 정견이 확보되고 나면 공부는 마무리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정견(正見), 즉 바른 시각(視覺)과 바른 견해(見解)가 확립되면, 그다음의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정견(正見)은 사실상의 깨달음입니다. 바탕 의식을 보고(見性) 그 자리에 쉽게 머물 수 있게 되면, 나와 너 그리고 나와 사물과의 관계는 이미 원만함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팔정도의 시작에 정견(正見)이 있습니다. 애써 닦은 결과 얻어지는 것이 깨달음은 결코 아닙니다. 먼저 깨닫고, 그 후에 닦아가야 합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가 여러모로 맞는 말입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왕이나 먹던 음식을 누구든 먹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왕의 옷을 만들던 옷감으로 일반인의 옷을 짓고, 왕이나 살던 그런 집에 아무나 돈만 내면 잘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허락도 되지 않았던 일, 가족을 버리고 은둔하여 오랜 세월을 닦아야만 어렵게 이룬다는 깨달음 공부를 이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마치 깨달음의 각축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000배를 하지 않으면 얼굴 한번 볼 수 없었던 생불(生佛)들을 이젠 스마트폰을 통해 만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한정판 명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살았는데, 갑자기 90% 창고 세일을 시작한, 마치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