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3. 깨달음 (Enlightenment) (81)
谷神不死
그것은 만나기 어렵다. 그 이유는 "나"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듯, 나는 그것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것은 말과 글로 설명하기 어렵고 나누어 줄 수도 없지만,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깨닫겠다는 미음만 있다면 말이다.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을 얻은 사람은 그런 일이 있어도 절대 개의치 않는다. 밑도 끝도 없이 '회개하라'느니, '천국이 가까이 왔다', '너 자신을 알라'느니거경궁리(居敬窮理), 고함을 치고, 몽둥이찜질을 하고, 도저히 생각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話頭)를 내놓는 이유...오매일여(寤寐一如), '쉬지 말고 기도하라', '에고'를 버리라는 말도 안 되는 지시... 그도 안되면 세상을 버리라..
깨달음이란 별것이 아니다. 스스로 깨달았음을 알아챈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인정을 받을 필요 없이, 스스로 깨달아 깨달음에 대한 일점(一點)의 의심도 사라져 편안한 자리에 들면 깨달음이다. 누구나 이미 깨달아 있다. 그래서 부처는 두 종류의 부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스스로 부처임을 아는 부처요, 다른 하나는 부처임에도 불구하고 부처임을 모르고 사는 부처이다. 세상은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기에, 깨달음을 찾기가 그리도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마치 숨쉬며 살고 있는 사람이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중생은 왜 미혹의 고통 속에 살아가는가? 집착(執着) 때문이다. 자기(自己)라는(我相)... 내 몸과 내 마음이 나라는(人相)... 나..
깨닫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동기가 있다. 첫번째 동기는 '삶의 어려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나는 고(苦)와 지멸(止滅)에 대해서만 말한다"고 선언했다.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그가 그랬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은 근본적 괴로움이다. 게다가 삶의 난관까지 닥친다면 엎친데 덮치는 격이다. 그러나 삶의 어려움 해결은 깨달음의 동기로서는 'B급'이다. 왜냐하면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것이 그 뒤를 잇게 마련이며, 그것들이 해결되어 편안해지게 되면 공부의 동력을 잃어 다시 미망(迷妄) 속으로 환원(還元)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A급의 깨달음 동기라면 당연히 '자기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궁..
깨달음은.. 삶이 즐거운 사람에게, 이 정도면 살만한 사람, 삶이 허무한 사람, 삶이 그저 그런 사람, 삶이 지루한 사람, 죽지 못해 산다는 사람, 그리고 삶을 포기한 사람에게는 오지 않는다. 깨달음은 진정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오게 되어있다. 깨닫고자 한다면, 왜 나는 깨어나야 하는가... 진정 나는 이 삶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나?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무엇도 포기할 수 있나를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나머지 生은 거기서 나온 답에 따라 살아가라.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
오후점수(悟後漸修) 시타르타는 왜 유여열반(有餘涅槃)을 언급했을까?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마음(ego)과 몸은 단번에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닦을 필요가 없는 해맑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돈오돈수(頓悟頓修)가 맞다. 무위법(無爲法)이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기대어 살고 있는 마음과 몸은, 신수대사(神秀大師) 말대로 게으르지 말고 먼지털고 닦아내어 때가 끼지 않도록 해야한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부패했던 정부가 단번에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잘라낼 것 잘라내고, 그들의 내면(內面)에 새로운 상(像)을 심어줘야 한다. 오후(悟後)에 영지(靈知)는 에고를 설득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득명(得命), 즉 찌들고 ..
온 것은 가기 마련이다. 오고 감은 둘이 아니며, 온 것과 간 것은 모두가 물거품이요, 꿈이요, 허깨비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왔을 때 조심(調心)해야 한다. 그래야 실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갈 것이란 것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오지도 가지도 않는 놈으로 계속 지켜봐야 한다. 올 때 오는 것을 아는 놈이 있고, 갈 때 가는 걸 아는 한 놈이 있지 않은가? 정신적으로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시간을 보내다가 마음 하나 고쳐 먹자 심신에 평화가 왔고, 그 다음부턴 성인(聖人)의 말씀들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었다는 Y씨가 있고, 죽자 살자 선정(禪定)에만 들던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의 응어리가 확 풀려나가, 그야말로 해탈(解脫)을 이루었다는 K씨가 있었다. 두 사람 다 얼마 간을 잘난척하며 그렇게 지냈었는데, 시..
사람이 대체로 비슷하다고 하나, 사람 수 만큼 성향이 다름은 누구나 인지한다. 하지만 편의상 크게 나누어 세 가지 부류로 이야기 해보자. 하나는 이치(理致)를 중히 여기는 타입, 대체적으로 책 꽤나 읽었고 스스로를 지적(知的)이라 생각하는 부류이다. 두번째는 이치보다는 체험을 중히 여기는 타입, 모든 이론은 口羅(구라?)라고 생각하는 부류, 세번째는 이도 저도 아닌 타입, 가장 수가 많고 이랬다 저랬다 게으르고 귀찮은 것 싫어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부류이다. 여기서 조사어록(祖師語錄) 등에 나오는 상근기(上根器)라는 특별 타입은 예외로 하겠다. 말 한마디나 몸짓 하나에 퍼득 깨쳤다는 그 사람들 말이다. 아마도 그분들은 前生(?)이란게 있어 거기서 99.99% 이미 공부를 마쳤거나 누군가 재미를 위해..
깨달음의 보상 깨달음을 열반(涅槃)이라고도 부른다.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 'nirvana'의 음역으로 "고통의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 열반은 단지 "그 자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시작된다. 심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moksha)되고, 그 뒤를 육체적 안락(安樂)이 따르게 된다. 혹자는 "단지 마음의 끄달림으로부터만 벗어날 뿐, 육체적 문제는 여전하다"라고 주장한다. 충고한다. 당장 그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들이 입에 달고 사는 심신일여(心身一如)나 불이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망발이 아닌가? 마음과 몸은 둘이 아니다. 어찌 마음이 편한데 몸은 불편할 수 있으며, 몸은 고통 가운데 있는데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가? 초견(初見)을 이룬 후 잠시 동안 그간 고통받던 신체적 어려움들이 남아있을 수 있다. 적..
깨달음의 경계 체증(滯症)이 모두 내려가 버린 듯...밑이 쑥 빠져 버린 듯 너무나 시원한 기분, 세상 이치가 모두 알게 된듯한 자신만만함, 내가 사라진듯 얽매어 있었던 것으로부터의 해방감, 표현하기 어려운 고요함 속의 안정감, 에너지가 넘치는 가벼운 몸, 발이 허공을 딛는 것 같은 느낌, 눈이 밝아진 듯 사물이 초롱초롱하게 보이고, 미래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신감, 天上天下唯我獨尊의 느낌, 그리고 한없는 행복감... 수행자에게 이런 신비스런 체험이 일어나면, 통상 '드디어 나에게도 깨달음이 왔구나! 고생은 끝났고, 이제부턴 행복 시작이야'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경하(敬賀)할 일이다. 결코 그것에 대고 초를 칠 생각은 없다. 그러나...그런 것들은 단지 지나가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오래지 ..
한국어에서 단순히 '안다'로 말해지는 것에 대해 영어권 사람들은 know, see, get, have, understand, realization, cognition 등등 그 표현이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 know와 see의 차이는 하늘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하늘과 땅은 붙어 있어 사실상 구별이 모호하지만 그 둘을 하나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보통 'I know'와 'I see'를 두리뭉실 혼용하지만 따져보면 그 차이가 천지보다 더 큼을 알게 된다. 같은 "안다"는 말이지만, know는 속세(俗世)의 표현법이고 see는 출세간(出世間), 즉 깨달음의 언어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볼(see)때 단순히 보지(just look) 않고 기존의 지식으로 여과하여 저장한다. 즉시 과거형으로 바뀌는 속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