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6)
谷神不死
한 편인 줄 알았는데, 두고 보니 딴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이단(다를 異, 끝 端)'이다. 고로 기독교 입장에서 불교는 이단이 아니다. 불교는 기독교를 외도(外道)라 부르지만... 개신교 입장에서 신천지는 이단이다. 그러면 신천지 입장에서 안식일교는 이단일까? 가톨릭 입장에서 개신교는 이단이고, 유대교 입장에서 예수는 이단이다. 하지만 개신교가 가톨릭을 이단이라 하거나, 신천지가 안식일교에 이단이라 하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한다. 개신교의 뿌리가 가톨릭이기 때문이다. 이단이란 단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이다. 이단이 있으므로 발전이 있다.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그들의 주장이 일리가 있으면 받아들이면 되고, 정말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하늘이 알아서 할 일이다. "시앗끼리는 하품도 옮지 않는다"는..
화두(話頭)를 보는(看) 것을 통해 성품(性品) 자리에 이르는 수행법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하고, 단전(丹田)을 지키는 것을 통해 밝음 자리에 통하는 방편(方便)을 의수단전(意守丹田)이라고 한다. 선도(仙道)를 단지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꾀하는 방술(方術)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은 전체에 대한 식견의 부족 때문이다. 성품을 깨우치는 일은 모든 인류 모든 종파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기독교에도 나름 '관상법(觀想法)'이 있으며, '거경궁리(居敬窮理)'라는 훌륭한 성품 보는 공부가 유교(儒敎)에도 있다. 간화선의 시작은 조사선(祖師禪)이라고 생각된다. 처음엔 스승이 직접 그 자리(本來面目)를 가리켜 깨우쳐 주던 것에서 형편상 화두라는 방편을 사용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선도는 성품 자리에 ..
자기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자기가 누군지 아는 사람에겐 외로움, 우울함이 없습니다. 자기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과거에 대한 후회가 없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는 생각의 개입이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고, 관념(觀念)에 끄달림이 없이 들리는 그대로 듣고,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한가하게 삽니다. 그런 건강한 상태를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 하며, 그런 사람을 깨어있는 사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특별한 사람만 그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생각만 바꾸면 당신도 그리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잠시만 내려놓으면 바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성(自性) 자리는 여여합니다. 성철(性徹)은 돈오돈수(頓悟頓修)와 함께 늘 몽중일여(夢中一如)를 주장했습니다. 하루는 향곡(香谷)이 그에게 와, "자네는 양 머리 걸어놓고 개고기를 팔고 있네"라고 말했습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하다고 시비를 건 것이 아닐까요? 그 말에 性徹은 "개고기나 팍 묵으라!"라고 대꾸했답니다. 그런 것을 선문답(禪問答)이라고 합니다. 자성(自性) 자리는 언제나 여여합니다. 꿈속에서도, 화두(話頭)가 들리든 안 들리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단번에 닦아지는(頓修) 자리입니다. 하지만 에고(ego)는 좀처럼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수(漸修)가 필요한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와는 차원이 좀 다릅니다.

깨달을 만큼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스승에게 하직 인사를 하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면 떠나도록 해라.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오게 될 것이다. 너의 깨달음만으론 해결하기 어려운 병(病)을 얻게 될 것이니..." 제자는 자신만만하며 떠났지만, 몇 년을 견디지 못하고 병을 얻어 다시 스승을 찾아왔고 그 밑에서 갈고 닦아 마침내 큰 스승이 되었다는 중국 선가(禪家)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돌아온 제자에게 스승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를 가르쳤을까요? 그런 건 이미 숙지(熟知)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러면 무엇이었을까요?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깨달음이지만, 그것 역시 생각일 뿐입니다. 진짜 깨달음은 생각의 경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탐진치(貪..

보고, 듣고, 느끼는 대상(對象)은 내가 아니다. 그것을 알아채고 있는 놈이 바로 나다. 알아채는 그 놈은 이 몸, 이 마음에 속하여 있지 않다. 그에게 이 몸과 마음은 나로부터 비춰지는 그림자이다. 대상은 내가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공부는 시작한다. 그다음은 대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나는 여여(如如)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몸과 마음도 수시로 변하고 있다. 늘 말하듯, 그것은 단지 내가 알아채는 대상에 불과하다. 몸과 마음이 나라고 알고 있어서는 매우 곤란하다. 그것과 떨어져,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확실해질 때,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럴 즈음이 되면 그것들을 그대로 두어도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것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부턴..

초기 불교의 무아론(無我論) 신봉자인 한 유튜버와 총림(叢林) 방장(坊長) J 스님의 문답을 들었다. 서로 언급은 없어도 코드가 맞지 않았는지 이야기는 너무 지루하게 전개되었다. 예상대로 방장 스님은 너무 천진난만했고, 유튜버의 예의 차리겠다는 태도는 너무 어색했다. 후일담에 유튜버가 말하길, 석가모니의 말씀에 '나'라는 것은 오온(五蘊)이며, 색수상행(色受想行)까지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아는 것이 식(識)이냐, 즉 자성(自性)이냐, 아니면 그것 외에 무엇이 있느냐? 는 물음과 부처님은 모두가 연기(緣起)의 한 묶음이라 하셨는데, 혹시 그것이 있다면 연기(緣起)의 밖에 있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방장스님이 답을 얼버무렸다는 것이다. 결국, '無我論이냐, 진아론(眞我論)이냐'로 다투..

무엇보다 깨달음(見性)이 먼저입니다. 깨달음이 없다면 공부를 이어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먼저 깨닫고(頓悟), 이어서 닦아 가는 것(先悟後修)이 바른 순서입니다. 팔정도(八正道)의 첫 번째가 정견(正見)이라는 것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른 견해(正見)가 곧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견해(見解)를 가지게 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어지게 됩니다. 깨달음을 얻으면 육바라밀(六波羅蜜)도 따로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정견(正見)만 있으면 보시(布施)는 저절로이며, 지계(持戒), 인욕(忍辱)도 자연스레 피어납니다. 나머지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바른 견해(見解)를 가졌는데, 혹시 나머지 것들이 저절로 실현되지 못한다면 무언가 에러가 일어난 것..

공부처에는 불상(佛像)을 모시지 않는다. 법상(法相)도 짓지 말라 하였는데, 그것 역시 상(相)이기 때문이다. 부처상에 절하지 않는 수행자를 여럿 보았다. 변(辯)인즉, 싯다르타도 깨닫기 전에는 자기와 다를 바 없는 중생(衆生)이었으며, 잠시 후엔 자기도 깨달아 부처가 될 터이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 한편 일리(一理)가 있는 말이구나, 생각했다. 물론 싯다르타는 존경받아 마땅한 스승이지만 그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을 뿐이다. 그 후 각자 알아서 찾아가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다. 나 역시 처음에 큰스님으로부터 화두(話頭)를 달랑 받았을 때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주소 없이 '서울 김 서방'을 찾는 것과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
하루는 스승(圓悟)이 법석(法席)에 올라 이르길, "란 말에, 운문(雲門)은 라고 했다 하나, 나는 "라고 하겠다고 했다. 그 말에 대혜(大慧)는 앞뒤가 크게 끊어져 버리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어떤 가르침을 받고, 어떤 수행을 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견문각지(見聞覺知) 무엇이 되었든, 소식(消息)이 오면 그것으로 일단락이다. 그래서 혜능(慧能)은 해탈(解脫), 선정(禪定)보다 오직 견성(見性)을 강조한 것이다. * * * *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