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6)
谷神不死
노자는 말했습니다. 깨달음이란, '지식(知識)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어드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세간(世間)에서 깨달았다는 것은 몰랐던 것을 알아 분별이 늘었다는 말이지만, 출세간(出世間)의 깨달음은 앎을 포기하고 자연무위(自然無爲)와 합일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통찰(通察)이나 직관(直觀) 같은 생각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 자리와 만나는 순간, 모두 녹아 하나(理氣一元)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상락아정(常樂我淨)과 통합니다. 생사(生死)와 고락(苦樂), 유아-무아(唯我-無我), 선악(善惡)을 모두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이를 절학도인(絶學道人)이라고도 일컫는데, 일 없는 가운데 몸과 마음은 늘 편안함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이 풍진(風塵)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말입니다.
현상계(現象界)는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는 자에 의존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는 자의 상태에 따라 현상은 달라지고, 보는 자가 보지 않으면 현상은 곧 사라진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 연연하지 말라. 그것들은 내 마음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이다. 모든 것은 변하며 모든 것은 지나간다. 나에게 변치 않는 각성(覺性)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산다면, 그것보다 더 허망(虛妄)한 인생은 없다. 밖에서 찾지 말라. 눈 밖, 귀 밖, 저 멀리에 있는 것은 무엇하나 실(實)다운 것이 없다. 오직 실다운 것은 각성뿐이며, 그것만이 나(自性)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실재이다.
스승의 말은 너무 지루하다. 그는 같은 이야기를 순서와 단어를 바꿔가며 하고 또 한다. 그래도 그의 이야기가 매번 새롭게 들린다면 기대를 해도 좋다. 당신은 가능성이 있는 제자이다. 당신은 바위(고정관념)요, 그의 말은 그 위에 떨어지는 낙숫물이다. 당신은 샌드백이요, 그는 스피디한 주먹쟁이다. 당신이 달아나지만 않는다면 바위는 두 쪽이 날 것이고, 샌드백은 터져 버릴 것이다. 오래 묵은 카르마가 단번에 녹을 것이라 기대해선 안 된다. 그것은 당신에게도 스승에게도 마찬가지다. 공부는 곰탕을 끓이는 것과 같다. 불이 너무 세면 넘쳐서 먹을 것이 없어진다. 약간은 약한 불이 진국을 만들어 낸다. 중도에 불질을 멈춰서는 안 된다. 결국은 끈질긴 놈이 이기는 법이다.
자아(自我), 즉 본성(本性)을 확인하는 것이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만나고 보면 그 말이 헛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생각들을 내려놓고 고요히 지켜보노라면, 우리(識)가 하는 짓을 담담(淡淡)하게 지켜보는 무언가가 있다. 무어라고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신묘(神妙)한 물건인데, 그것이 본성이며, 그것을 확인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이제 우리는 정보공유의 시대, 비밀이 없는 세상에 살게 되어 모든 것들이 알기 쉽게 풀이되어 여러 매체를 통해 공개되고 있다. 아울러 뒤로 미루어왔던 실존(實存)에 대한 관심 역시 일반화되는 시절을 맞았다. 아마도 몇 년이 지나 인공지능(人工知能)이 일반화되는 시점 즈음이 되면 견성이 거의 상식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기존의 사고..
어떤 이는 재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 사람의 캐릭터는 재물이다. 어떤 이는 권력으로 존재한다. 그 사람에게는 휴머니즘이 없다. 오직 과시하는 권력뿐이다. 어떤 이는 학식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어떤 이는 예술성으로 존재를 증명하고, 어떤 이는 존재 없음(?)으로 존재를 나타내려 한다. 어쨌든 사람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산다. 왜냐면 우리는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어떤 이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으로, 어떤 이는 포악하고 까다로운 성격으로... 어떤 이는 남을 놀라게 하고, 남을 불편하게 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자기를 몰라주고, 그들에게서 잊혀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중 특이한 경우는 내가 이렇게 희생하고 산다고, 타인에게 부담을 주는 것으로 ..
내가 없으면 세상은 환영(幻影)이지만, 나를 발견하는 순간 세상은 실재(實在)한다. 나와 세상은 하나다. 내가 있어야 비로소 세상도 있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남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죽은 자에게 세상은 더 이상 세상이 아니다. 싯다르타가 말한 무아(無我)는 자성(自性)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나(我)는 이 몸과 마음이었으며, 그것들은 自性에 소속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수행자가 찾는 "나"는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내가 아니다. 그것은 自性이라 불리는, 말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본면목(本面目)이다. 이제는 샹카라가 말한 "브라만(Brahman)만 실재이며, 물질은 실재치 않는다. 브라만(Brahman)이 곧 물질이다"라는 말이 이해되는가?
세상에 일어나는 불협화음의 대부분은 욕구불만으로부터 발생한다. 작게는 두통이나 소화불량, 우울증에서 시작하여 나아가서는 인간관계의 위기와 파탄, 크게는 국가 간의 돌이킬 수 없는 분쟁에 이르기까지 그 폐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각설하고... 욕구불만의 원인은 첫째, 실존(實存)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둘째, 현재를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존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을 참아낸다는 것과는 아무 관계없다. 사실상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너무 모르며, 알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혹자는 물을 것이다. 나는 왜 현재에 살지 않는단 말인가? 맞다.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현재에 살지 않고 있다. 그것은 늘 불안하다. 그래서 과거나 미래로의 여행을 지속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삶에서 극히..
이 몸이 내가 아니고, 마음 역시 나는 아니다. "그것"은 모양도 소리도 향미촉(香味觸)이 없어도 보고, 듣고, 느낀다. 그것은 늙지도 죽지도 않고, 집착 역시 없으며, 괴롭지도(苦) 않다. 그것을 무엇이라 해도 상관은 없지만, 어떤 경우에도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없다면, 세상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편의상 그것을 진아(眞我)니,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적당한 이름은 아니다. 노자(老子)는 그것을 '무명(無名)'이라 하였으며, 그것이 만물을 생겨나게 하고, 스러지게 한다고 했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으며, "지금 여기"에도 있다. 종잡을 수 없는 그것을 알아챈 것을 가리켜 '깨달았다', 혹은 '견성(見性)했다'라고 한다. 견성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먼저 그것을 깨우치고 나서 ..
성령(聖靈)이란 거룩하고(聖), 신령한 것(靈)을 말한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하는 것은 성령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인간만이 가진 위대성이다. 깨달은 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인다 했듯이, 하느님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성령이 아닌 것이 없고 하느님 자식이 아닌 사람은 없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요지(要旨)가 중생들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부처란 것이듯이, 예수 역시 세상사람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리고자 세상에 왔다. 어떤 사람의 몸에도 성령은 깃들어 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성령이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生靈(Living Soul)이 되었다" (창세 2:7) 세상에 無知처럼 큰 죄는 없다. 세상에 자신이 부처라는 것,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란 것을 ..
우리는 두벌의 시각기능(視覺機能)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육안(肉眼)이요, 다른 하나는 심안(心眼), 즉 내부 시각 능력이며, 이것은 내부 오감의 기능을 함께 갖는다. 육안과 심안의 다른 점은 육안은 동일 시공의 것만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심안은 시공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넘나든다는 것이다. 육안은 거의 에고의 지배를 받으며, 십중팔구 '탐심(貪心)'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정신력을 원하거나 깨우침을 추구하는 사람은 심안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정신세계와 친하려면 일단 몰입(沒入)이 필요한데, 그것은 심안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몰입과 삼매는 연기(緣起) 관계이며, 따라서 심안과 삼매(三昧)도 서로 동조하는 조화가 있다. 그러므로 삼매에 들으려면 심안이 살아나야 하며,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