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6)
谷神不死

감각과 호흡이 없어지고, 심지어 옅은 생각(細煩惱)마저 사라져야 "비로소 삼매(三昧)다"라는 설(說)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삼매(Samadhi)의 층차를 8단계, 혹은 9단계까지 정해놓고,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넘어 멸진정(想受滅盡定)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산의 나무나 바위는 모두 깨달아 있을 겁니다. Samadhi는 그 목적이 깨달음 아닌가요? 부처는 옅은 삼매인 일선(一禪)에서도 깨달음이 가능하고, 사선(四禪)은 불환(不還), 즉 돌아오지 않는 경지라 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마음이 하나에 고정되어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면 삼매라 해도 무방합니다. 독서나 게임(game) 삼매도 있고, 연애 삼매도 있습니다. 그 모든..

고시학원에 가면 수많은 사람이 행정학, 법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행정학 법학 공부일까요? 고시합격이 아닙니까? 기획사에 가면 수많은 연습생이 노래와 춤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들은 취미로 노래와 춤을 배울까요? 인기 연예인이 되는 것 아닐까요? 수많은 명상단체와 선방(禪房)에는 수많은 이들이 정좌(正坐)를 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이 일시적인 마음의 편안함일까요? 깨달음(見性)이 아닐까요? 낚시하러 가면 고기 몇 마리는 잡아 와야 하고, 사냥하러 가면 멧돼지는 고사하고 꿩 몇 마리쯤은 들고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멀리서부터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가르침을 구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대개는 자기의 박식함과 수련에 대한 열정, 그리고 어떤 어..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신(神)이 차려준 균형 잡힌 식단(食單) 중에 너무 단 것, 기름진 것에만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우리가 풍요롭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눈이 흐려지고, 귀가 어두워져,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소리만 듣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우 단편적이다. 그것이 우리가 늘 부족함을 느끼는 이유이다. 우리의 눈이 뜨여, 神이 제공한 풍부한 식단을 모두 바라보게 된 것을 가리켜 '깨달음'이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편파적 시선이 바로잡히고, 소란스러운 잡음들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을 가리켜 '해탈'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사람들은 믿음이 바깥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도 무언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바깥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안으로부터 나온다. 바깥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믿음과 무지 때문이다. 자기를 알아챈 순간, 모든 것의 시작이 "나"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the Holy Bible) 역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했다. 옳은 이야기다. 의(義)는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그리 믿으면 義이고, 믿지 않으면 불의(不義)가 된다. 있음도 내가 있다고 믿어야 있고, 없다고 믿으면 없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 모두는 내가 있다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존재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있으므로 있고, 내가 ..

진리는 모두를 하나로 아우른다. 그러므로 기독(基督)만이 진리라는 말이 독선(獨善)이듯이, 불교(佛敎)만이 진리라는 말도 옳지 않다. 이(理)와 기(氣)는 하나다(理氣一元). 그러므로 理를 깨우쳤으면, 氣 역시 갈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있으면 필히 저것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이것뿐"이라는 관념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한 과목만 잘해서는 시험에 합격할 수 없다. 견성(見性)을 했다면 氣를 알아야 하고, 소주천(小周天)을 이루었다면 본성(本性)을 깨우쳐야 비로소 하나가 된다. 더 이상 찾을 것이 없어야 한다. 더 이상 기웃거림이 사라져야 한다. 하나가 된 자는 부족함이 없으며, 남의 동네에 가서 자기의 깨달음을 알릴 필요도 없다. 그런 사람을 무사인(無事人)이라 부른다.

'명상(冥想)'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다. 아이러니하게도 각기의 신앙(信仰)단체들이 명상을 말하고 있으며, 정신과 의사들 역시 명상을 처방한다. 명상이 가진 신경 안정 효과 때문이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명상은 본래 목적에서 많이 어긋나 있다. 명상은 우리 정체성을 확인하는 훌륭한 방편이다. 명상을 통해 우리는 '참나', 즉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만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호흡을 관(觀)하든, 관상(觀想)기도를 하든, 주력(呪力)을 하든, 묵조선(默照禪), 간화선(看話禪), 또는 단전(丹田)을 수련하든, 모두가 바로 본래(本來)의 자기(自己)를 만나도록 구조되어있다. 그래서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는 말도 있다. 문제는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번거로워서인지..

없는 것을 있다고 하기는 쉬워도, 있는 것을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체험을 해보면 알 수가 있을 텐데.... 남방 불교의 신봉자 중엔 "나란 것은 없다(無我)"는 가르침을 성실히 따르는 것으로는 부족해서인지 진아(眞我)란 말을 들으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다. 역시 사람은 체험보다 믿음이 우선인가 보다. 뻔히 눈앞에서 살아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믿고 싶지 않으면 자신만 믿지 않으면 될 터인데, 왜 잘 믿고 있는 남의 일에 마음을 쓰시는지 모르겠다. 眞我를 체험했다는 사람은 있다고 믿으라 하고, 아무리 살펴봐도 나라는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것대로 믿으면 될 것을 말이다. 眞我를 찾아 행복하다는 사람에게 굳이 아니라고 가르쳐서 그들 마음을 상하게 할 필요..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교리(敎理)를 정립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이 '무아(無我)'이다. 당시 브라만교는 죽어도 죽지 않는 나, 즉 '아트만(atman)'을 중심교리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 종단(宗團)을 만들면서 기존 종단의 종지(宗旨)를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싯다르타가 자성(自性)이 실재(實在)함을 너무도 잘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無我라면, 무상(無常)도 헛소리가 되고, 고(苦)와 집착(執着)도 모두 꿈같은 이야기가 되고 만다. 내가 없다면, 무상(無常)의 이치가 어찌 유용(有用)할 것이며, 나란 것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고통받고 누가 윤회(輪廻)를 할 것인가? 그의 무아설(無我說)이 한편으론 우리의 허망..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은 결코 善惡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혜능(慧能)은 선악을 규정지어 생각하지(思) 말라고 했지 선악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선악이 무상(無常)하니까, 달리 말해, 여기서의 선이 저기에선 악이 되고, 저기서의 악이 여기 와서는 선이 되고 마니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善惡이 없다면 어찌 善惡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말은... 금강경에서 말했듯, '머무르지 말고 마음을 내라(應無所住以生其心)'는 뜻입니다. 요즘 佛者(지식층) 간에, 특히 조계종(曹溪宗) 안에서도 무아론(無我論)이 번지고 있다니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진정 無我라면 무아를 아는 놈, 무아를 주장하는 놈은 누구란 말입니까? 연기(緣起)작용에 의해 그리된다고요? 때린 놈 맞은 놈은 없고 아픔만 있다고요..

바라보고, 들어 보고, 맡아 보고, 맛보고, 느껴 보고, 생각해 보고, 삶이란 오직 "봄(look)" 잔치입니다. 비밀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정법(正法)은 눈에 감추어(眼藏) 있습니다. 그 눈(慧眼)을 찾은 것을 가리켜 깨달았다(見性)고 합니다. 눈을 찾기는 너무 쉽습니다(至道無難). 우리는 종일 그 눈을 쓰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업(生業)을 포기하고 평생(平生)을 찾아도 못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그 일은 너무 어렵습니다. 물속에서 물을 찾고,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