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46)
谷神不死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었는가 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 번 예수를 부인했고, 도마 역시 예수의 상처를 확인한 후 믿음을 유지했습니다. 자기를 직접 확인한 것을 가리켜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재(實在)를 확인한 것입니다. 見性이 없이 자기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견성이 있어야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미래에 대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가 누군지부터 확인하고 살아야 행복합니다. 見性이 없는 믿음은 모래 위의 집(砂上樓閣)입니다.

"이 몸이 '나'이지, 무슨 '나'란 것이 따로 있겠어? 돈 벌어 잘 사는 것 빼고 인생 뭐가 있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대화를 미루세요.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이 마음이 내가 아니면 무엇이 나란 말이오?"라고 말하는 사람에겐 질문해 보세요. "마음이 두 가지가 있어서 하나는 왔다 갔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는 마음이 있는데 혹시 그 마음 느껴 본 적 있어요?"라고 말입니다. "이것저것 다 가져보고 해봐도 허망합디다. 이번 생이 가기 전에 꼭 깨닫고야 말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체 말고 자성(自性)을 찾는 길을 바로 알려 주세요. 그는 평생토록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될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수많은 수행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Mantra(眞言)를 반복해 외우며 깨달음이 오기를 기다리는 방법(念佛禪), 몸, 느낌, 마음 그리고 인식대상(身受心法)을 차례대로 관(觀)하며 열반(涅槃)에 이르기를 구하는 방법(위빠사나), 묵묵히 마음을 비추며 실재(實在)를 찾는 방법(默照禪), 화두(話頭)를 의심하는 방법(看話禪)이 있으며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고 많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와 조사(祖師)들은 그런 수행을 권하기보다는 대면하여 깨달음을 설명하거나, 불쑥 질문을 던져 자성(自性)의 발현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것을 직지인심(直指人心) 일승법(一乘法)이라고 합니다. 어떤 깨달음 법이 당신의 마음에 와 닿습니까? 이왕이면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돌진하는 것이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요즘 젊은이들은 변죽만 울리는 연애를 하지 않습니다. 갑돌이, 갑순이처럼 냉가슴만 앓다가 남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바로 치고 들어갑니다. 평생 명상(冥想) 흉내를 내고 있다고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평생 사념처(四念處)를 Sati(念)한다고 열반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 화두(話頭)를 들고 있다고, 평생 단전만 지킨다고(意守丹田) 소식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고 있는 동안 마음이 좀 편안해질 수는 있습니다. 사마디(Samadhi; 禪定)를 체험할 수도 있고, 건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깨달음은 아닙니다. 수행하는 목적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채기 위해서입니다. 명상하는, 사념처를 하는, 화두를 드는, 단전을 지키는 내내 그것에 빠져 있지만 말고, "그 행위를 하는 그놈이 누구인가?"에..

깨닫기를 원하면 생각에서 벗어나세요. 생각에서 벗어나야 자성(自性)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보이는 대상은 생각일 수 있어도 보는 자는 생각이 아닙니다. 들리는 것은 생각으로 만들 수 있어도, 듣는 자는 생각일 수 없습니다. 느낌은 생각으로 끌어올 수 있어도, 느끼는 자는 생각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보는 자를 보고, 듣는 자를 듣고, 느끼는 자를 느끼세요. 보는 자, 듣는 자, 느끼는 자 쪽으로 관(觀)을 이동시키는 것을 가리켜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합니다. 그때 드러나는 것이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진여자성(眞如自性)이며, 그것을 만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사물을 인식(認識)할 때는 인식자와 인식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인식자가 있으므로 인식 대상이 있고, 인식 대상이 있으므로 인식자가 있는... 서로에게 의지하여 존재합니다. 그런 경우 무엇이 주재자(主宰者)가 있을까요? 과연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는 것은 존재할까요? 그래서 남방불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나는 없다"는 무아론(無我論)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없다고 해도 "나"란 것은 있지 않습니까? 이론상으론 없고 모양은 분명치 않을지 몰라도, 분명히 존재하지 않나요? "나는 없다"고 주장하는 그놈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그것은 이미 몸과 마음을 벗어나 있으나, 차원이 다르게 존재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이름을 지은 것이 "텅 비어 있기는 하지만 묘하게 있다"는 의미의 진공묘유(眞空妙有), 혹은 "..

무아(無我)란 에고(自我)가 실재하지 않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내(自性)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에고(自我)라는 것이 있는 듯해도 꿈(夢) 같고, 허깨비(幻) 같고, 물거품(泡) 같고, 그림자(影) 같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없다면 붓다는 왜 먼 길을 여행하며 깨우침을 주려 했을까요? 진정 無我라면, 수행은 해서 무엇할 것이며, 윤회는 누가 하며, 고통을 받는 자는 누구입니까? 진정으로 내가 없다면,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을 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자성(本來面目)이 있길래 그것을 찾으려 수행도 하고, 고(苦)를 멸(滅)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 아닌가요? 깨우침을 얻으면 버리려 애를 써도 버릴 수 없고,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실재(實在)를 체험하..

헷갈리는 시험 문제의 답을 구할 때는 답에서 멀다고 생각되는 것부터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방법이 있다. 깨달음을 얻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다 보면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것이 남게 된다.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그것' 말이다. 변하는 것을 '그것'이라 할 수는 없다. 좀 전엔 없었는데 지금 있었다가, 잠시 후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허깨비라 부르지 않는가?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이 마음도 내가 아니다. 이름도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모두 내가 아니다. 그것들은 잠시 후 사라질 것들이다. '참나(?)'는 바꿀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것이며, '그것'을 만난 것을 가리켜 '계합(契合)', 혹은 '聖靈을 받았다', '見性했다'고 한다. 이젠 그만 졸고 답을 내야 한다. ..

오랜 세월 동안 선정(禪定)을 닦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알아차림(awareness)이 약하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은 정념(正念)이란 이름으로 '팔정도(八正道)'에도 들어 있지만, 타성(惰性)에 젖다 보면 그냥 지나치기 마련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깨어있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알아차림(Sati)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경전(經典)과 어록(語錄)들이 가리키며 강조하는 것, 그리고 화두(話頭)들 하나하나는 모두 다 그곳(眞如)를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에 바로 들이대어야지(just look), 그것들의 의미(意味)만을 따지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마치 남의 다리를 긁으며 시원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경봉선사(鏡峰禪師)가 말했듯, 이번 일생 안 살은 셈 치고 덤벼들어야 담박 깨닫는다. 주변을 빙..
'의식이 있다', '자존감이 있다', '깨어있다'는 말은 동의어입니다. 자존심(自尊心)이란 자존감(自存感)을 아는 마음입니다. 자존심이 있는 사람은 외부의 풍경보다 자기 내면세계를 더 중요시합니다. 自存感은 견성(見性)의 전조(前兆)입니다. 자존감이 미약한 사람은 깨우칠 수 없습니다. 見性이란 自存이 파악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흙덩이를 던지면 개새끼는 그것을 쫓아가지만, 사자는 흙덩이 던진 자를 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존감이 투철한 사람은 외부 경계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에게 비치는 외부 풍경은 모두 자존으로 대체됩니다. 그것이 見性, 깨우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