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虛其心 (211)
谷神不死
인간은 원래 착하다(性善說), 아니다, 인간은 원래 악하다(性惡說) 두 가지 믿음 사이에서 사람들은 오래 다투어 왔습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천사는 원래 천사로, 악마는 원래 악마로 만들어졌을까요? 악마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악마도 원래는 천사였다는 것을 혹시 알고 있습니까? 우리의 안에는 천사와 악마가 함께하며, 또한 천사와 악마를 알아차리는 놈도 공존(共存)합니다.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어떻게 살기로 결심하느냐에 따라 천사도 되고, 악마도 되는 법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사는 것이 당신에게 더 바람직합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헛수고인줄 뻔히 알면서도 그것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안 된다고 결론 내린 것을 혹시나 하며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10년을 사용한 지팡이에서 복숭아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왜 '진공묘유(眞空妙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만들어냈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이미 '없다(無我)'고 한 말을 번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싯다르타 앞에 엎드릴까? 그는 자기를 찾은 사람, 무(無)에서 유(有)를 찾아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한다.
공부(性功)의 핵심은 "고요함"이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보는 것이다. '선(禪)'이란 생각을 내리고(單) 보는(示) 것이다. 그래서 '어두운(冥) 생각(想)'이라 하는 것이다. 고요함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육체이완(body relaxation), 다른 하나는 정신이완(mental relaxation)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몸이 이완되면 마음도 편해진다. 주시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다. 경직(硬直)된 몸으로는 고요함에 이를 수 없다. 반면에 고요함에 이르면 모든 경직이 풀린다. 몸이 고요해지면 마음도 고요해진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첫째는 "나는 없다"는 전제(前提)를 놓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선 찾을 그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때리는 자도, 맞은 자도 없는데 아픔만 있다", 즉 '내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말에 생각 없는 많은 사람이 고개들을 끄덕인다. 한마디로 바보 게임, 발가벗은 임금님 놀이이다. 조작된 교리(敎理)에 속지 말라. 뇌를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 여기 엄연히 이렇게 내가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할 수는 없다. 쉼 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시(注視)에 마음을 쓰면 쉼 없이 변하는 그것(사물)들을 쉼 없이 알아채고 있는 '이것'이 있..
제갈량(諸葛亮)은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동남풍을 불러 막강한 조조군(曹操軍)을 물리쳤다고 삼국지(三國志)는 말한다. 몇 년 내 백두산이 불을 뿜어낼 확률이 99%라고 지질학자들은 말하며, 화산(火山)이 폭발하면 한반도는 물론이고 주변국까지 초토화(焦土化)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것의 징후(徵候)로 너무 잦은 백두산 부근의 지진이 현재 감지되고 있으며, 산 위 생생했던 나무들이 말라 죽고 있고, 온천수 온도도 빠르게 올라가고(80도 이상) 있다고 한다. 최근 튀르키예 지진이 알리듯 천재지변은 막을 수 없다. 강성했던 나라가 화산 폭발로 멸망해버린 사례도 많다. 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은 있다. 운 좋게도 그때를 맞춰 시기적절하게 태풍이 불어준다면... 아니라면, 赤壁大戰 때처럼 ..
돈과 권력이 나를 평화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답고 정돈된 환경이 나를 고요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마음속이 뒤숭숭하다면..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깨끗한 환경이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수평선이 보이는 해변가 아름다운 집이 우울증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입니다. 내 마음속에 평화로운 궁전을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그곳에 가서 쉬어야 합니다. 그것을 명상(冥想)이라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라” 예수의 말입니다.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를 ‘믿음이 필요한 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자, 마음을 비우는 자라고 하면 어떨까요? 가진 것이 많을수록 학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생각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생각들의 덮개처럼 자성(自性)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라.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올해엔 송곳마저 없도다.“ 어느 수행자가 남긴 글입니다. 심령(Spirit)이 이 정도는 가난해야, 비로소 가난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깨달음과 깨닫지 못했음은 둘이 아니다. 둘 다 착각일 수 있다. 뻔한 물건을 가지고, 한쪽은 있다 하고, 한쪽은 없다고 한다. 있지 않다면 없음을 어디서 찾겠으며, 없는 가운데 어찌 있음을 찾겠는가? 하지만 '내가 깨달았구나', '아직 답답하구나'를 알고 있는 놈이 있다. 그놈을 알아차렸다면, 깨닫고 못 깨닫고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진짜가 나타나면 가짜는 빛을 잃는다.
마음을 부처(卽心是佛)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자성(自性)이라 해서도 맞지 않습니다. 마음 없음이 도(無心是道)라고 해야 맞습니다. 마음은 커졌다 작아졌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허깨비 같은 물건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마음이라 일컫는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알음알이(識) 역시 왔다 갔다 합니다. 한없이 헷갈리고 흔들리는 것이 마음입니다. 하지만 뒤에서 묵묵히 마음을 헤아리고 감찰하고 있는 놈이 있습니다. 그놈을 잡으세요. 그놈이 주인공(自性)입니다.
같은 침대에 누웠다고 ‘하나’는 아닙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나 ‘너와 나는 하나다’ 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까칠한 사람을 만나면 사기꾼 소리를 듣습니다. 정말 하나가 맞다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화가 통하는 사람도 매우 드뭅니다. 고개를 끄덕인다고, 한편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대화가 통하는 한 명만 있어도, 세상은 풍요롭습니다. 정말 하나인 사람은 하나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 얼마나 많은 타인이 함께 살고 있는지를 알아챌 때, 비로소 하나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하나’를 외친다고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염불로 그칠 공산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