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虛其心 (218)
谷神不死

'무아(無我)'란 있어 보이는 말인 듯 해도, 내가 없으면 먹을 수도, 잠잘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내가 없으면 알아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엄연히 실재(實在)하고 영원한 존재다. 고정되어 있지 못하다고 하여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알아챈 것이 깨달음이다. 몸과 마음은 나는 아니지만 그것들의 변화를 알고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는 놈이 있다. 그것이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자아(自我)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자. 그럴 수 있는 힘을 기르자.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이 솔직할 수 있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에게도 솔직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보는데 왜 남의 눈이 필요한가? 무엇이 두려운가? 자기 자신에게만이라도 솔직해지자. A를 A라고 말하고, B를 C라고 말하지 말자. 과감히 벗어나 보자. 배고프면 배고프다 하고, 졸리면 졸립다고 말하자. 주입받은 모든 것에서 벗어나자. 가식을 모두 벗어버리자. 세상의 생각은 세상의 생각이고, 순간순간 아닌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당신은 깨어난다. 그리되는 순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진짜 자기를 만나게 된다. 자유를 알게 된다.

밭에 고추 모종을 심으면 고추가 열리고, 토마토를 심으면 도마토를 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 밭에 건강을 심으면 건강해지고, 돈을 심으면 돈이 생긴다. 문제는 의심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당연하다. 일어날 일이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의심하지 말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라. 마음의 밭을 가꾸고, 거기에 바라는 바를 심어라. 그리고 당연하다 생각해라. 당연히 원하는 결실을 얻을 것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라고 했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나 역시 그럴듯한 말재주나 외모에 눈이 흐려져 여러 차례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 인간관계가 원만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속마음을 읽어야 한다. 면전에서 아첨을 떤다고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된다. 상대의 말을 살피고, 그 안에 숨은 그의 감정을 알아채야 한다. 그동안 그가 해온 행동이 어떤 동기에서 나오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동기를 파악하면 내면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좋은 말을 하거나 호의를 보일 때, 단순히 나를 위한 것인지, 그의 이익을 위해 부득이 그리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들리는 말에만 귀 기울이지 말고, 그의 표정이나 움직임(Body language)까지 살펴야 한다.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것..

'성동격서(聲東擊西)'라는 말이 있다. '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을 친다'는 말이다. 원하는 것을 진정으로 얻는 방법은 그것에 너무 에너지를 크게 쓰지 않는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이해하라, 사람을 움직일 때는 강요하지 말고, 상대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라. 그가 어떤 선택을 하던 손해 볼 일은 없다. 매달리지 말라. 그리하면 상대는 당신을 업신여길 수 있다. 늘 여유 있고 당당하게 연출하라. 그것이 확실한 승리의 길이다.

자는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다시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깨우침은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둔 열쇠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를 찾아 어디로 길을 나서겠습니까? 세상에 깨달음과 연결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을 멈춰야 합니다.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려놓고, 내려놓고, 또 내려놔야 합니다. 깨우침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은 단지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사람입니다.

행간(行間)을 읽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여(眞如) 본래면목이란 생각 이전의 자리입니다.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 이전 자리, 생각과 생각 사이에 관심을 기울여 보세요. 몸을 이완하고 마음도 내려놓고, 고요히 그 자리를 관조(觀照)해 보세요. 그때 나타나는 자리가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여실(如實)하게 드러나게 될 때, 어떤 이는 환희심(歡喜心)이 일어나고, 어떤 이는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하다'라고 하고, 어떤 이는 궁금하던 이치가 밝히 알아졌다고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혜안(慧眼)이 열렸다, 깨달았다, 견성(見性)했다고 합니다.

요즘 자전거에는 거의 구동계(驅動械)란 것이 달려 있다. 큰 힘쓰지 않고 자전거를 편히 타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것은 무게와 스프라켓(sprocket)의 수(數)에 따라 싼 것(5만 원)에서 시작해 자동장치가 달린 것은 몇백만 원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 하지만 값싼 구동계를 달아도 누구나 충분히 자전거를 즐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구동계가 아니라 엔진(심폐와 다리)의 힘이다. 물론 고가(高價)의 구동계를 장착하면 다소는 편리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수행 특히 깨달음을 말할 때 강조되는 것이 '고요함'이다. 그것을 가리켜 불가(佛家)에선 '선정(禪定)'이라 하고, 선가(仙家)에서는 고요함에 듦, '입정(入靜)'이라고 한다. 仙家는 그것을 복잡하지 않게 단순히 하나, ..

수행자(특히 인도 수행자)가 苦行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업(Karma)을 털어내기 위해 그리한다. 싯다르타도 처음엔 그들을 따라 산에 올라 오랜 시간 고행(苦行)을 해 뼈와 가죽만 남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총명함은 그것이 고(suffering)를 소멸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苦를 소멸시키는 원리를 깨달았다. 그의 알아낸 것은 내가 없다면 苦가 있을 수 없다는 원인무효법, 즉 무아(無我)이다. 그것은 불교의 기둥 교리가 되었다. 그 말대로라면 모든 것은 허망하다. 우리는 어떤 노력(수행)도 할 필요가 없다. 산다는 것이 코미디이다. 그들의 말은 다분히 논리적이어서 반박에 쉽지 않다.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논리적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없는가? 그것은 그치지 않을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