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虛其心 (211)
谷神不死
선도(仙道)는 자성(自性)을 중요시 합니다. ‘내가 있음’을 기초하여 수련을 이어갑니다. 그 점에 있어선 불가(佛家)도 마찬가지입니다. 自性을 알아채는 것이 견성(見性)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상(我相)'은 다릅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아니라 ‘나‘라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我相이 가리고 있는 한, 自性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 점에 있어선 선가(仙家)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가(仙家)는 헛된 꿈을 쫒지 않습니다. 自性이 힘을 얻기 위해 에너지(氣)가 필요합니다. 고요의 에너지를 싣지 않은 생각은 망상(妄想)이기 때문입니다.
선도(仙道)는 몸을 중요시하고, 몸으로 공부를 시작한다. 이어서 물질(몸)의 기본이 되는 기(氣)로 이어지고, 의식(神)의 장악으로 공부를 마무리한다. ‘내가 없다’, 특히 몸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몸을 부정하는 주장은 자기를 부정이므로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이 있다. 몸이 없이 생각인들 할 수 있는가? 몸이 없으면 볼(色) 수도, 들을(聲) 수도, 냄새(香) 맡을 수도, 맛(味)을 알 수도, 감각(觸)할 수도, 의미부여(法)도 불가능하다. 고로 몸을 부정하고는 깨달을 수도 없다.
마음은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실을 수 있는 마차(馬車)와 같습니다. 마차에 무엇을 실었느냐에 따라 마차의 가치는 변합니다. 마치를 앞에 있는 말이 끌어줘야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마차를 움직이려면 앞에 있는 말 엉덩이를 때려줘야 합니다. 핵심은 말 엉덩이를 누가 때려주느냐입니다. 말과 마차를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전적으로 마부(馬夫)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차를 크게 만든다고, 마차에 금(金)칠을 한다고, 마차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차가 가치 있으려면 실려있는 내용과 마부의 자질이 중요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애초부터 무엇도 담을 수 있는 가늠할 수 없이 큰 주머니입니다. 애써 치장하거나 크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에 무엇을 담았느냐에 따라 그 마음의 주인(主人)이..
깨달은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자연에 순응하며 사느냐, 자기 욕구 실현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사느냐입니다. 선인(仙人)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실현하므로, 늘 자족(自足)하며 삽니다. 그에게는 세상에 대한 아쉬움이 남지 않습니다. 무엇에도 지배당하지 않으며,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선도(仙道)를 닦는 사람의 마음은 거의 단전(丹田)과 함께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그것을 의수단전(意守丹田)이라 합니다.
기는 이를 따르고(理發氣隨), 이는 기를 타고(氣發理乘)있다는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의 상반된 주장이 있습니다. 그 둘은 순간에 벌어지는 일이라 아무나 쉽게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명(自明)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일들을 '알아채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성(自性)이라 하고, 알아챈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알아채는 자가 없다면 主理든 主氣든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성(自性)은 무궁무진한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알아차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가 모를 뿐 그것에겐 우리에게 필요한 것, 모두를 이루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깨우쳐야 합니다. 수표를 단지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불쏘시게에 지나지 않습(無用)니다. 하지만 수표의 기능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무엇이던 필요한 물건을 구해 옵니다. 깨달음은 대단한 일입니다. 하느님(自性)을 알아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리선(義理禪)'이란 공안(公案)의 이치를 따져 그 의미를 깨우쳐 나가는 禪을 말하는데,바람직하지 않다 하여 사구선(死句禪)이라고 한다.'여래선(如來禪)'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禪定(Samadhi)을 닦는 禪을 말하지만,말과 이치를 넘어섯다 하여 수행자 사이에 최고로는 쳐주지 않는다.'조사선(祖師禪)'은 일반적으로는 혜능(慧能)과 그의 직제자들이로 이어지는 선법(禪法)을 말하지만,보통 스승이 제자의 근기(根器)를 보아가며 문득 일러주는 공부법이다.특별한 조건(禪定)을 강요하지 않으며, "평상심(平常心)이 道"라는 말처럼 일상생활에서 경험되는 근원적인 마음(自性)을 발현시킨다.선도仙道는 단전(丹田)을 이용해 입정(入靜)한다.통기(通氣)와 축기(蓄氣)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조사선의 기법을 많이 채용한다.
"깨달음이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보다 쉽다"는 말을 들으면 짜증이 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10년을 하루 10시간씩 공부(명상)에 힘을 쏟았는데도 아직인 사람에겐 그런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전생의 공덕(功德)이나 조상신의 은덕(隱德)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도무난(至道無難)은 100% 진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이다. 요령(回光返照)이 몸에 붙지 않아 꺼내어 쓰지 못할 뿐... 스승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받아 들여라. 그것이 으뜸 공덕이다.
깨달은 자는 에너지 소모율이 낮다. 그는 생각이 필요할 때만 그것에 몰두하고, 나머지 쓸데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무위(無爲)는 자기가 할 일도 미루는 삶이 아니다. 무리하게 애쓰지 않는 것이다. 일이 있을 땐 힘을 다하여 하고, 쉴 때는 식(息)을 단전에 내려놓고 충분히 쉰다. 그는 쓸데없는 것을 머리와 가슴에 담아두지 않으므로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는 일이 없다.
'깨달음'이란 내가 나라고 알고 있었던 나는 내가 아니며, 이렇게 능력 있고 덕성(德性)을 갖춘 존재가 나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불안하기만 한 이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 말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우친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 가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요지부동의 그런 존재가 나란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에너지 덩어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베풀고 베풀어도 더 베풀 것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서 나는 이해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상대를 이해하면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바로 주인공이라는 것을 절절히 아는 것이며,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나 하기 나름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