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虛其心 (211)
谷神不死
구년면벽이란 무엇인가? 불가에서는 이것을 마음을 바로 보아 본처(本處)를 찾는 수행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달마는 그때까지 견성(見性)을 하지 못했단 이야기인가? 양무제와의 그 당당함은 출처가 무엇이란 말인가? 견성만이 모든 것이라 믿었던 달마는 중국에 와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것은 돈오점수(頓悟漸修)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 이후 달마의 행적(行跡)을 보면 알수가 있다. 그는 9년 동안 명(命)공부, 즉 성명쌍수(性命双修)를 행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그는 능엄결(楞嚴經)의 신선(神仙), 화엄경(華嚴經)의 십지보살(十地菩薩)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왜 진공(眞空)이라 했을까? 진짜 空은 일반적 "텅 빔"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묘유(妙有)라 했을까? 일반적 존재론으로는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眞空妙有는 나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단어입니다. 그것은 필설(筆舌)로는 표현하기 어렵고, 오직 깨달음의 분상에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하루빨리 견성해야 합니다. 진공묘유는 출세간(出世間)의 체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시집을 가거나, 하던 일을 뒤로 하고 절로 들어가는 것을 '출가(出家)'라 한다. 하지만 '가출(家出)'이라 하면 불량(不良)해 보인다. 요즘 출가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한다. 삶에 지쳤고, 속세(俗世)에서는 '자기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이유란다. 하지만 삶에 지쳐 가족과 생업을 떠난다면 그것은 가출이라 해야 옳다.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찾는답시고 머리 깎고 절로 가거나, 인도나 미얀마 히말라야로 떠난다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찾는다는 그 '자기(自己)'를 절에서, 인도에서, 히말라야에서 잃어버렸는가? 늦은 밤 가로등 밑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여인에게 행인이 물었다. "무엇을 찾고 계신가요?" "바늘을 찾고 있습니다." "바늘을 어디서 잃으셨는데요?" "바느질하다 방에서 잃..
어느 날 눈을 뜨고 꿈을 꾸었습니다. 커튼이 걷히며,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달도 별도 그 안에 있고, 하늘 땅도, 도로와 건물들도 모두 그 안에 있었고, 너도나도, 개도 소도, 그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놈이 있었습니다. 그놈은 그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구분이 안 되는 이상한 놈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돈오(頓悟)를 했다고 말했지만, 나는 기분 좋으라고 그냥 하는 말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부턴 근심 걱정 없이 건강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같이 집착할 것 없는 아지랑이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요새도 눈 뜨고 꾸는 꿈은 먼지 하나 없는 파란 하늘입니다.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 상(像)은 변하고, 소리(聲)는 변하고, 느낌(觸)은 달라져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타나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道, 혹은 作用力(Force)이라 하며, 세상 모두는 그것에 의해 펼쳐진다. 하지만 에너지(氣)가 없으면 그것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에너지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 작용력을 공(空), 성령(聖靈), 성품(性品), 무위자연(無爲自然) 혹은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알아챈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있으며, 우리 가운데 분명히 작용하지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없다(無我)"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주장하게 ..
진리는 영원합니다. 그것은 부처가 만든 것도, 예수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없어도 2 × 2 = 4, 2 × 3 = 6입니다. 부처나 예수를 진리 앞에 두지 마십시오. 진리가 가려져 안 보일 수 있습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죽이라(殺佛殺祖)'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물러섰을 때 진리는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맹신자들은 명상(冥想)을 반대한다. 잘못하면 빙의(憑依)가 된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 말이 한편으론 맞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를 내려놓고 마음에 틈을 만드는 것이 명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에너지(氣)이다. 그러므로 명상과 기 수련은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을 성명쌍수(性命双修)라고 한다. 통기(通氣)가 잘 되고 氣가 넉넉하면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氣가 알아서 방어막을 쳐주기 때문이다.
"알겠다"라고 말할 때는 'I know'가 아니고 'I see'이다.'I know'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할 때이고, 지금 알게 된 것은 'I see'이다.See라는 단어는 '본다'와 '안다'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본다(See)'는 단지 눈으로 보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우리는 들어보고, 맡아보고, 먹어보고, 맛을 보고, 느껴보고, 알아본다.그러므로 견성(見性)에서의 見은 단지 '본다'는 의미 외에 '깨닫는다'는 의미가 있다.하지만 그것이 관념적이어선 안 되며, 실제의 체험이 필요하다.그래야 見(See)의 본래 의미와 부합되기 때문이다.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을 때, '그것(性)'을 단지 '본다'고 했지만선사(禪師)들은 그것을 Clear 하게 밝히지 않고, 은유(隱喩)를 사용한다. 그..
노자(老子)는 일견 냉정해 보입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핵심만 간단히 이야기합니다. 그는 "마음은 허(虛)하게, 배는 실(實)하게(虛其心實其腹)"로 성명쌍수(性命雙修)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선도(仙道)만의 깨우침과 동시에 장생불사를 동시에 얻는 묘책(妙策)입니다. 仙道에는 마음을 비우는(虛) 별도의 복잡한 행법(行法)이 없습니다. 단지 배를 實하게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이 비워지도록 합니다. 단전을 지키는 것(意守丹田)이 그것입니다. 처음엔 정확한 단전(丹田) 자리를 몰라도 괜찮습니다. 굳이 애를 써 숨을 조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랫배(下腹)의 중앙에 마음을 두고 천천히 숨을 지키노라면 얼마 안 가서 자연스럽게 丹田이 드러납니다. 그 자리가 에너지의 중심 센터입니다. 태식(胎息..
명상을 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선정(禪定; Samadhi)에 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선 집중(集中)이 필요한데, 그것은 "생각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내려놓은 것"이다. 집중을 위해 한점이나 촛불 등에 생각을 모으는 방법을 쓰기도 하지만, 곧 한계를 느껴 그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에너지의 소모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몸을 지키기 위해 알아서 자동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명상한답시고,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극단적인 긴장의 시도들은 알고 보면 사실 그 반대 긴장을 풀기 위한 방편이다. 긴장이 풀린 상태가 되어야 진짜 집중(Attention)이다. 사실상 이완(Relaxation)보다 쉬운 것은 없다. 그냥 힘을 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렵다고 애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