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虛其心 (218)
谷神不死

"당신도 깨달아 있다"라는 말을 늘상 듣고 살아도, 자신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깨닫고 나면 무언가 대단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자기가 누군지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들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일 뿐입니다. 이 몸을 "나"라고 할 수 없고, 이 마음은 내가 아니며, 나에게 부여된 어떠한 수식어도 "나"일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몸 안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나를 솔직하게 보고 들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 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마치 불꽃처..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고, 저것이 없은 즉 이것도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작용(作用)과 연기(緣起)를 알아챈 것입니다. 괴로움이란 잘못된 의미 부여로 인한 부작용입니다. 무슨 일이 닥치든 그것에 별다른 의미(意味)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대로 흘러가 버립니다.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 만사(萬事)의 작용처가 텅 비어있다는 것을 알면 언제나 여여(如如)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없애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루 종일 온갖 생각 속에 지낸다 할지라도, 단전에 마음을 두고, 그것에 에너지를 부여하지 않으면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단지 에너지를 지키며 살 뿐입니다. 언제나 빈틈이 없이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 그것을 일상삼매(一相三昧)라고 합니다.

시심마(是甚麼 :이 뭣고?), 삼서근(麻三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뜰앞 잣나무)를 단순한 말이나 염불(念佛)로 생각해선 안됩니다. 몸(가슴)과 마음 어느 구석에 걸려서 뿌리치기 어려운 조건이 되지 못한다면 화두(話頭) 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선도(仙道)의 소주천(小周天) 공부 역시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삼관(三關)을 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소주천을 진행하다가 꼬리뼈(尾閭)에서든, 등 중앙(脊中)에서든, 대추(大椎)에서든, 氣가 걸려 꼼짝없이 흐르지 못하면 오히려 즐거워해야 합니다. 수행을 지속하는 한, 조만간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맥(脈)이 뚫려 나갈 때의 그 개운함이란 무엇에도 비기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깨달음(밝음)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계기로 하여 점점 밝아지게 됩..

잘 싸우는 사람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한다. 상대의 무기로 상대를 공격한다. 논쟁(論爭)할 때는 먼저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말을 수긍해 줘라. 말을 많이 하면 쓸데없는 말도 하게 마련이다.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그에게 부드럽게 말하라. 능숙한 토론자들은 중간중간 상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하면 상대는 허점(급소)을 보이게 마련이다. 상대보다 말을 적게 하면서 숨으로 상대의 기운을 단전(丹田)으로 끌어들여라. 한 호흡 쉬고 상대가 했던 말 중에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을 찾아내라. 그것을 잡아 간단히 질문 형식으로 짧게 추궁하라. 미소 지으며 분명하게 말하라. 전세(戰勢)는 당신 쪽으로 넘어오게 된다.

예수 그는 구세주(Messiah)임이 틀림없다. 그는 인류가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고 떠났다. 하나는 원죄(原罪)를 없앤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누군지 알려주었다. 사실상 그는 罪라는 것이 원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과일 하나 따 먹은 게 죽을죄란 말인가? 죄란,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는 허깨비에 불과하다. (罪無自性從心起) 그는 죄 없이 순순하게 목숨을 내놓았다. 그것은 우매한 사람들을 향한 더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우리의 정체성, 본래면목을 아주 간단히 알려주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 6:9) 당신의 있지도 않은 죄는 이미 2000년 전에 사라져 버렸고, 아버지가 바로 하느님인데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깨달음은 당신 자신의 것이다. 누구의 말이나 글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 해결할 문제다. 神이든 부처든, 그 누구도 깨달음을 줄 수 없다. 까닭 없이 추상적이면 100% 실패한다. 그것은 교리(敎理)나 어떤 신앙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을 위해 가족과 생업을 버릴 필요는 없으며, 어디론가 가지 않아도 된다. 체험에 의지하지 말라. 그런 것은 깨달음이 아니며,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당신의 알아차림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당신뿐이다. 적어도 그것을 위해선 애쓸 필요가 없다. 그저 생각을 줄이고, 주시자(注視者)로 남기만 하면 된다.

객승이 물었다. "한 물건도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습니까?" 조주가 말했다. "내려놓기 싫으면 지고 가거라." 내려놓는다는 것은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지만 어두움(無明) 속에선 집착 말고 다른 방도가 없다. 그냥 흘러가면 되는 것이다. 내려놓고, 지고 가는 것은 둘이 아니다. 그냥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면 된다. 남김없이 내려놓았다 생각되면, 내려놓고 있는 그놈도 내려놓아야 한다.

구년면벽이란 무엇인가? 불가에서는 이것을 마음을 바로 보아 본처(本處)를 찾는 수행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달마는 그때까지 견성(見性)을 하지 못했단 이야기인가? 양무제와의 그 당당함은 출처가 무엇이란 말인가? 견성만이 모든 것이라 믿었던 달마는 중국에 와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것은 돈오점수(頓悟漸修)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 이후 달마의 행적(行跡)을 보면 알수가 있다. 그는 9년 동안 명(命)공부, 즉 성명쌍수(性命双修)를 행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그는 능엄결(楞嚴經)의 신선(神仙), 화엄경(華嚴經)의 십지보살(十地菩薩)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왜 진공(眞空)이라 했을까? 진짜 空은 일반적 "텅 빔"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묘유(妙有)라 했을까? 일반적 존재론으로는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眞空妙有는 나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단어입니다. 그것은 필설(筆舌)로는 표현하기 어렵고, 오직 깨달음의 분상에서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하루빨리 견성해야 합니다. 진공묘유는 출세간(出世間)의 체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시집을 가거나, 하던 일을 뒤로 하고 절로 들어가는 것을 '출가(出家)'라 한다. 하지만 '가출(家出)'이라 하면 불량(不良)해 보인다. 요즘 출가하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한다. 삶에 지쳤고, 속세(俗世)에서는 '자기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이유란다. 하지만 삶에 지쳐 가족과 생업을 떠난다면 그것은 가출이라 해야 옳다.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찾는답시고 머리 깎고 절로 가거나, 인도나 미얀마 히말라야로 떠난다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찾는다는 그 '자기(自己)'를 절에서, 인도에서, 히말라야에서 잃어버렸는가? 늦은 밤 가로등 밑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여인에게 행인이 물었다. "무엇을 찾고 계신가요?" "바늘을 찾고 있습니다." "바늘을 어디서 잃으셨는데요?" "바느질하다 방에서 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