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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사람들은 신앙(信仰)과 종교(宗敎)를 구별하지 못한다. 아니, 안 한다고 말해야 옳다. 신앙과 종교는 혼용되어서도 안 된다. 신앙인들은 자기의 믿음을 '종교'라고 부르는데, 그 말은 초로(初老)의 할머니가 새색시가 되고 싶어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편을 '신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신랑(新郞)'이란, 갓 결혼하였거나 결혼하는 남자, 혹은 신혼 초의 남편을 이르는 말이란 것은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종교(宗敎)'는 '꼭대기(宗) 가르침(敎)'이란 말이며, '신앙(信仰)'은 '우러러(仰) 받들어 믿는(信)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지만, 신앙은 100년 전과 지금의 신앙이 다르다.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 미주(美州), 시베리아, 남미, 아프리카의 신앙이 각..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 그곳과는 인연을 완전히 끊고자 하는 사람과 퇴직 이후에도 계속해서 회사와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과의 회사에 대한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깨달음을 얻고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세상에 남아 고생하는 중생(衆生)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가리켜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보살을 부처의 밑에 두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상 보살이 부처보다 윗길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그는 부처의 생각을 한 단계 뛰어넘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선도(仙道)를 닦는 사람들이 말하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 죽는 것이 너무 당연한데, 어떻게 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반문한다. "밑져야 본전 아니냐", "인간의 마음속에..
맛나게 담배를 피우는 비구(比丘) 도반(道伴)에게 내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찌하여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가?” 그가 말했습니다. “그것도 모르는가? 환갑(還甲)이 지난 비구에게는 술, 고기 등 계율이 사라진다네. 난 이미 칠십하고도 둘인걸...”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환갑 지난 사람이라도 신앙인이라면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문(佛門)에 있는 한 계율(戒律)은 지켜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요? 옛날에는 환갑(環甲)을 넘은 수행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철이 든 사람은 알아서 몸에 나쁜 담배 정도는 삼갈 것이고, 술도 체력이 받치지 못해 못 마실 터이니 인심이나 쓰자고 한 말이 아닐까요? 제 뇌피셜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 소위 성인(聖人)이란 사람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구하면, 한결같이 "깨어있으라"고 말한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단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느끼지도 못하고 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그놈이 어디론가로 도망가 있다. 노오란 장미를 볼 때, 당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당신은 장미 자체를 보고 있지 않다. 당신은 당신에게 이미 입력된 장미의 모양, 물리의 작용에 의하여 나머지 색은 모두 흡수되어 버리고 반사되는 노란 색만을 본다. 중국인, 일본인을 볼 때도, "중국인은 지저분해", "일본인은 교활해"라는 당신에게 이미 이미지화한 중국인, 일본인을 당신은 본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살했다고 했을 때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전생(前生)도 후생(後生)도 아닌 현재..
늑대 소년 이야기가 있다. 늑대들에 의하여 성장한 한 소년이 인간 세상에 돌아와 일어나는 일들을 엮어낸 것이다. 본인이 늑대가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을 깨우쳤다고 해서 바로 그 즉시 모든 인성(人性)이 회복되지는 못한다. 제대로 숟가락질도 하지 못하고, 화장실 사용하는 법도 모르며, 보름달이 뜨면 뒷산에 올라 습관적으로 “우~” 하고 늑대 울음을 할 것이다. 내 주변에는 부모처럼 모시던 큰스님을 떠나 그가 열반(涅槃)하고 난 지금도 그녀의 법해(法解)에 대하여 의심한 나머지 심지어 ‘마구니’라고까지 부르는 불교 경전(佛敎經典) 연구가가 있다.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느냐고 그를 비난하기에 앞서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그녀의 깨달음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하..
깨달음이란 변치 않는 세계, 출세간(出世間)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관(觀)이라 하고, 다른 말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라 합니다. 무엇을 깨닫는가요? 1. '나(subject)'와 보이고 들리는 '대상(object)'이 둘이 아님을 깨닫습니다(頓悟). 2. '나(seer)'와, '지켜보는 것(scene)'이 둘이면서 둘 아님을 봅니다. 3. 오직 그 자리(본래면목)가 눈앞에 성성(醒醒)함을 봅니다. 4. 성(性)을 알았으니(見性), 명(命)을 닦으며 여유작작하게 살아갑니다(漸修). 그 자리(眞如)는 때가 묻지 않고, 상하지도 않으니, 닦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지켜볼 뿐입니다. 닦아야 할 것은 오직 이 몸(命) 뿐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두려워하고 있는 그것을 지켜보는 당체(當體)가 있다. 그것은 두려움을 모른다. 드러난 모든 것이 허깨비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도 그를 해칠 수는 없다. 그것이 만들고 허무는 주체(主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들고 허무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여여(如如)하게 존재로만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한다. 힌두는 그것을 브라마(Brahma)라고 하며, 그 神 앞에는 공물(貢物)조차 없다. 그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앞에는 숭배조차도 가당치 않다. 그렇다면 유대와 기독교에서 섬기는 "야훼(Yahweh)"에 대해선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그 유대의 신(神)은 질투하고, 노하기도 잘하고, 인간사에 개입하며, 다른 신단(神團)들과 전쟁도..
"氣는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허상(虛像)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말에도 일리(一理)는 있다. 생각이 없다면 氣도 없기 때문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내가 주체(主體)이며, 내가 있으므로 세상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들이 없다면, 어디에 가서 "나"를 찾는단 말인가? 결국, '내가 있으므로 氣가 있다'는 말은 '氣가 있으므로 나도 있다'는 말로 통한다. 선도(仙道)를 하는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직접 氣를 체험하고, 기르고, 운전한다. 氣가 생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물론 그 생각은 자유다. 하지만 선도(仙道)를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깨달음을 얻으며 자유롭게 산다면, 한 번쯤은 달리 생각해봐..
깨닫지 못한 사람에겐 이 몸과 마음이 꿈(妄想)에 불과하지만, 개안(開眼)을 이룬 사람에겐 이 몸도 마음도 세상도 모두 실재(實在)한다. 왜냐하면 그때부턴 주인으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밝아진 이후는 세상에 살든, 중심 에너지와 합일하든, 그 결정권이 모두 자기에게 있게 된다. 그것이 선도(仙道)이다. 성명쌍수(性命雙修)가 아니면 혼은 허공에 날아오르고, 몸은 흙이 되어 흩어지고 만다. 그것을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 한다. 하지만 性命雙修를 이룬 사람은 한 단계 승급하여, 지선(地仙)의 자리에 올라 자유(Moksha)를 누리게 된다. 仙道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이나 장생불사(長生不死)는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性命雙修란 밝음(깨달음)과 함께 득명(得命), 즉 生命에 대한 운영권을 자기가 갖는 것이다.
원망도 하지 말고, 후회도 하지 말라. 지금의 당신이 당신의 선택 중 최상이다. 사람은 항상 더 좋은 것을 선택하도록 구조되어있다. 석가모니의 첫 출가 동기는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었다. 그것은 생노병사(生老病死), 즉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을 수 없을까였다. 사색의 사색을 거듭한 결과, 의식이 한 단계 승화하여 고통만 사라지면 좋겠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성제(四聖諦), 그의 가르침의 핵(核)이며, 그 뜻은 '고집멸도(苦集滅道)', 즉 고통의 원인은 집착(執着)이며, 그것을 다스리려면 도(道)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에서 여덟 가지 바르게 닦는 법, 즉 팔정도(八正道)가 출현한다. 그리고 최상(最上), 마지막의 과제(깨달음)가 무여열반(無餘涅槃), 즉 다시는 윤회(輪廻)하지 않는 ..